임유진 엑스플렉스 편집장
작가가 되고 싶었으나 글을 쓸 시간은 없던 그는 젊은 시절, 그저 먹고살기에 급급했다. 학교를 제때 가지 못했음은 당연한 말이다(시간이 좀 지난 후에 학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별다른 기술 없이도 할 수 있는 시시한 직업들을 전전했고, 일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 한 호흡에, 짧은 시간에 쓸 수 있는 것들 위주로 글을 썼다. 그가 주로 단편과 시를 쓰게 된 이유다. 장편소설을 쓸 시간적 물리적 여력도 없었거니와 당장 글을 팔아 원고료를 받아야 하는 그의 경제적 조건 속에서 장편은 선택지인 적이 없었다. 결국 그는 단편소설로 대가가 되었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무언가를 이뤄낸 미담을 소개하고자 하는 게 아니다. 퍽퍽한 삶의 조건이 레이먼드 카버라는 사람을 결국 단편소설의 대가가 되게 했다는 식의 결과론적 해석을 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는 그가 처한 조건 속에서 한 ‘선택’을 이야기하고 싶다. 가난과 궁핍에 내몰려 일을 해야 했지만, 그 낮 근무가 끝난 후 그는 소설을 썼다. 다만, 시간이 없어서 짧게 썼다. 다만, 돈이 없어서 팔 수 있는 글을 썼다. 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선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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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 보면 나는 부족한 게 많았다. 경제적으로, 재능으로도 역시 그러했다. ‘이게 아니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 다른 상황을 바라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지만, 그렇다 한들 달라질 것은 없었기에 당장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이때 내가 했던 일은 영화나 만화나 책을 보고 영어 공부를 하는 것이었다. 남들이 “좀 더 유용한 걸 해야 하지 않느냐”고 물어 올 때도 나는 그냥 이걸 했다. 왜냐하면 그것만이 나를 즐겁게 하는 일인 데다가 그것밖에 할 게 없었기 때문이다. 천성적으로, 일반적 의미에서의 스펙 쌓는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내릴 수 있던 최선의 선택이지 않았을까도 싶고. 시간이 흘러 나는 그 무용해 보였던 활동의 결과로 일을 하고 돈까지 벌 수 있었다(콘텐츠 기획 일에 그보다 더 좋은 준비 활동은 없을 것이었다). 물론 지금도 여전히 그 ‘무용’하다 불렸던 활동과 일을 함께 해나가고 있다. 그것도 꽤 만족스럽게.
완벽한 조건은 없다. 일정 정도 아쉬움과 부족함을 전제하고 살 수밖에 없다. 여기서 놀라운 점은, 그렇게 우리가 처한 조건과 상황 속에서 만들어가는 선택과 결정이 결국 우리를 만든다는 것이다. 불만이나 가정(假定)이 아니다. 실제 조건 속에서 아쉬움과 함께 만들어 내는 ‘진짜 행동’이 우리의 삶을, 우리의 미래를 만든다. 레이먼드 카버를 위대한 소설가로 만든 건 그의 환경이나 재능이 아니라, 일을 마치고 돌아와 차고에서 그가 ‘실제로’ 써내려간 그의 진짜 글 한 편이다.
임유진 엑스플렉스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