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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면 방화범? ‘팔자걸음’에 딱 걸렸네

입력 | 2015-08-11 03:00:00

[증거는 말한다]<5>CCTV속 단서 ‘걸음걸이’




2014년 3월 서울 강서구에서 발생한 ‘건설업체 사장 청부 살인 사건’ 용의자(왼쪽 사진)가 발끝이 안쪽으로 향하는 ‘내족지보행’을 하고 있다. 같은 해 6월 경기 성남시에서 유사한 걸음걸이를 보이는 중국동포 김모 씨가 포착됐고 이 증거 앞에서 김 씨는 범행을 자백했다. 경찰청 제공

2013년 4월 대구 수성구의 한 사설 어학원 앞. 봄인데도 겨울 점퍼와 장갑으로 온몸을 무장한 남성 2명이 폐쇄회로(CC)TV 화면 안에 나타났다. 모자와 마스크를 써 얼굴 식별이 불가능했다. 그들은 ‘미 문화원’ 간판을 건 어학원에 화염병을 던지고 황급히 화면 밖으로 사라졌다.

기자는 5일 ‘법보행(法步行) 분석 전문가 협의체’ 회장인 대전우리병원 원장 윤영필 정형외과 전문의와 함께 이 사건의 영상을 살펴봤다. 윤 원장은 기자에게 용의자의 어떤 특성이 보이는지 물었다. ‘까막눈이’인 기자는 “약간 뒤뚱뒤뚱 걷는데요?”라고 말했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그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윤 원장은 웃으면서 설명했다.

“뒤뚱뒤뚱 걷는다는 건 바로 걸음걸이의 파행(跛行·절뚝거림) 현상이에요. 좌우의 보폭이 다르고 땅을 지지하는 힘이 달라 절뚝거리는 모양새가 되는 것이죠. 또 오른발은 팔자걸음이네요. 이렇게 비대칭 보행을 하는 것으로 볼 때 틀림없이 척추가 휘어져 있고 발목을 자주 삐었을 겁니다.”

CCTV 영상 속에서 용의자로 추정되는 남성이 지나간 시간은 10초 남짓. 법보행 분석(걸음걸이 분석) 전문가인 윤 원장에겐 그 안의 수많은 정보를 읽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실제 당시 용의자 검거에도 윤 원장의 분석이 결정적 실마리였다. 윤 원장은 용의자의 부자연스러운 걸음이 척추질환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실제 용의자의 병원 기록을 확인해보니 척추질환을 앓은 병력이 있었다.

걸음걸이에는 많은 단서가 담겨 있다. 사람마다 걸음걸이에 고유한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 걸음걸이 유형만 하더라도 내족지보행(안짱걸음), 외족지보행(팔자걸음), 첨족(까치발), 종골보행(발뒤꿈치로만 걷는 걸음) 등 다양하다. 보행 시 사용되는 하체의 5개 관절(발·발목·무릎·고관절·골반) 움직임만으로도 뼈 신경 근육 등 병리적 특성을 분석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CCTV에 담긴 걸음걸이를 비교, 분석해 인물을 분석하는 것이 바로 법보행 분석이다.

한국의 법보행 분석 역사는 길지 않다. 2013년 처음 소개돼 같은 해 12월 전문의, 공학박사, 변호사 등으로 구성된 ‘법보행 분석 전문가 협의체’가 발족했다. 이후 경찰은 법보행 분석이 필요할 때 협의체에 자문을 하고 있다.

2014년 3월 발생한 서울 강서구 건설업체 사장 청부살인 사건이 대표적이다. 유일한 단서는 누군가 현장을 빠르게 빠져나가는 장면이 찍힌 CCTV 영상이었다. 경찰은 주변 CCTV 120여 대의 영상을 분석해 용의자가 2주 전부터 현장 인근을 오가는 모습을 찾아냈다. 영상 속 용의자는 성인에게서 보기 드문 ‘내족지보행’을 한 것으로 판독됐다. 경찰은 이후 용의자가 범행 닷새 전 은행 현금인출기로 향하는 장면을 찾아냈다. 경찰은 중국동포 김모 씨(50)의 인적사항을 파악한 뒤 또 다른 CCTV 화면에서 경기 성남시에 나타난 사실을 확인해 그를 검거했다. 걸음걸이 증거 앞에서 김 씨는 범행 사실을 자백했다.

법보행 분석은 용의자를 특정하는 용도로도 쓰이지만, 용의자가 아닌 사람을 가려내 수사 범위를 좁히는 데도 큰 역할을 하고 있다. 중요성이 높아지는 만큼 경찰은 분석의 신뢰도를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전문가 2인 1조로 교차 분석하는 ‘표준업무처리지침’을 마련해 전문가 2인의 의견이 일치할 때만 감정서를 제출한다. 또 정형외과 전문의와 공학박사가 각각 병리학적 분석과 공학적 분석을 함께 진행하도록 했다.

권오혁 기자 hyu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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