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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또 한 권의 책을 준비하며

입력 | 2015-07-21 03:00:00


현영석 록셔리 매거진 편집장

이따금 책을 만든다. 무언가 특출난 재능이 없으니 출판사를 통해 책을 냈을 리는 만무하고. 제대로 하는 거 하나 없지만 혼자서 편집자가 됐다 디자이너가 됐다 하는 식으로 북 치고 장구 치며 책을 만들고 있다. 이렇게 제작하는 방식을 셀프 퍼블리싱 혹은 소규모 출판이라 부른다. 기획에서 유통까지 출판에 필요한 과정을 스스로 통제하며 자신의 책을 만드는 방법이다. 이러한 방식이면 타인의 승인이나 간섭 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책을 만들 수 있다. 연필과 종이만으로 근사한 작품을 완성하는 제작자도 있으니 어쩌면 책을 만드는 데는 하고 싶은 이야기를 표현하려는 마음으로도 이미 충분한지 모르겠다.

드문드문 지금까지 네 권의 책을 만들었다. 처음 만든 후 뭐라 부르면 좋을까 고민하다 얼렁뚱땅 잡지라고 소개를 했다. 잡지를 만든다고 하니 간혹 편집장이라 불러주기도 한다. 듣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린다. 어색한 기분을 참지 못해 연신 아니라고 손사래를 친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내가 만든 얇은 책을 잡지라 부르기가 영 뻔뻔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유익한 내용이란 하나 없고 발행 시기 또한 들쑥날쑥 일정하지 않다. 그래서 가끔은 잡(탕)지라 소개하고는 탕은 묵음이라는 식의 실소조차 아까운 농담을 하게 된다. 책의 목표가 모 의류 브랜드의 초경량 패딩보다 3g 정도 가벼워지는 거라서 깃털 같은 이야기가 책장의 주를 이룬다. 잡지라기보다는 ‘웃기고 싶어 만든 책입니다’라고 설명하는 게 더 적절하지 않을까 싶다.

쓸모의 가치로 보자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무용한 것일 게 분명하다. 이런 거 왜 만드느냐는 소리는 하도 많이 들어 귀에 딱지가 되어 앉아 있을 것만 같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나 역시 이유가 뭘까 고민하게 된다. 세상엔 이미 재미난 것들로 넘쳐나고 그것들을 챙겨 보기에도 시간은 항상 모자란다. 이런 생각에 이르면 굳이 나까지 만들 필요가 있나 싶어 의기소침해진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내일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한 권의 책을 만들겠다는 사명감이나 결기 같은 것도 없다. 재밌으려고 시작한 것 같은데 만드는 과정이 또 마냥 재밌지만은 않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만들게 되는 이유가 뭐지 도대체. 이제는 그만해야지 하면서도 좀처럼 멈추지 못하는 걸 보니 그냥 하고 싶어서 만드는 게 아닐까 하는 싱거운 결론을 내리게 될 뿐이다.

‘한 번 더 만들어볼까’라는 마음에 다시 또 느릿느릿 몸을 움직이고 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처럼 매번 첫발을 떼기가 가장 힘들다. 좀 더 준비된 후에 시작하는 게 낫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발목을 잡아 끝도 없이 시작을 미루게 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디까지 준비돼야 시작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너 이렇게 머뭇거리기만 하면 완성은커녕 시작도 못하게 될 거라고! 이런 생각이 드는 게 처음이라면 ‘뭘 해도 망할 것 같은 분위기에 내가 더 조심스러워졌나 보다’ 하고 받아들였을 텐데 ‘인간은 똑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말처럼 매번 그래왔던 것 같다.

주저함이 길어질수록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쌓이는 시간으로 온몸에 무기력이 스며든다. 마음속 무의식은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많은 이유보다 내가 지금 하지 못할 부족의 증거를 꾸역꾸역 찾아내 들이밀기 시작한다. 어쩐지 내가 나를 가장 방해하는 기분에 일상의 무게는 점점 무거워지니 ‘조금 더 준비된 후에 시작하자’는 생각, 이거 왠지 게으름의 편에 서 논변을 펼치는 변호사쯤 되는 게 아닐까 싶어진다. 시작하고 저지르지 않으면 무슨 준비가 더 필요한지 끝끝내 알 수 없게 될지 모른다. 이제 그만 불확실로 가장한 게으름을 떨쳐내야지.

사람은 망각의 동물이라 한다. 나아가는 과정 속에서 조금씩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매번 아로새기고 망각하기를 반복해 시작 앞에서는 항상 똑같은 부담으로 출발을 머뭇거리게 된다. 신중한 판단에도 정도가 있고 준비를 핑계 삼아 시작을 미루는 데도 한계가 있다. 꽁꽁 숨기고 싶은 졸작이라도 지금 할 수 있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만큼의 노력으로 부딪쳐야 완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제는 정말 잊지 말아야겠다.

현영석 록셔리 매거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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