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역서울284 ‘은밀하게 황홀하게’전
이상진 작가의 ‘라이팅 토크’(2015년). 고풍스러운 옛 귀빈실 장식을 감추지 않고 작품 배경에 그대로 살렸다. 공연히 애써 가렸던 흔적이 품은 시간의 가치가 ‘빛’에 의해 드러났다. 문화역서울284 제공
영국군이 쓰던 탄약 창고를 개조한 아시아 소사이어티 갤러리는 식민지 점령군이 철수하면서 옛 기지에 남겨놨을 법한 그늘의 조각을 찾아볼 수 없는, 세련된 전시 공간이다. 외부 형태는 고풍스럽기 그지없지만 내부는 밝고 쾌적하다. 식민지 역사의 자취를 감추거나 지우지도 않았다. 비영리재단에 이 공간을 임대하며 정부가 제시한 조건 중 하나는 ‘원형 보존’이었다. 진입로에서는 드문드문 구형 대포 포신도 볼 수 있다.
위 사진부터 조덕현의 설치작품 ‘모성’, 사진작가 장태원의 ‘진부한 풍경 003’, 검은색 점토를 낚싯줄에 접착시켜 다양한 형상을 표현한 함진의 설치물 ‘도시이야기’. 문화역서울284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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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 구성을 새롭게 바꾼 건 없다. 원래 있던 것을 애써 가려 감추지 않고 오히려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 달라진 점이다. 2층 식당 벽면을 비추는 프랑스 작가 스테노프에스의 ‘파리-프랑수아’가 그 변화를 뚜렷이 보여준다. 영상은 반드시 청결한 스크린을 필요로 할까? 그렇지 않다. 시공을 뛰어넘은 파리의 옛 건물 이미지 영상이 식민지 조선에서 물려받은 공간의 뼈대를 비춘다. 애써 감추려 했던 ‘아름다움’이 비로소 드러난다.
작가의 일은 작업실에서 도구를 놓는 순간 종료되는 것이 아니다. 작품 하나만 놓고 보면 그저 발광다이오드(LED) 육면체일 뿐인 이상진의 ‘라이팅 토크’는 관객과 만날 공간과 작품을 어떻게 교배시킬 것인가 고민하는 시간의 중요성을 일깨운다. 2층 계단을 사람 그림자와 빛으로 채워낸 ‘그린 룸(RGB)’, 빛 사이 암전에 의해 드러나는 잔상의 의미를 살핀 ‘세트(미국식 목조주택)’를 내놓은 작가그룹 뮌도 눈여겨볼 대상이다. 문제는 공간이 아니다. 어떻게 쓰느냐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