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DB
정동현 셰프
내가 밀크티 맛을 제대로 알게 된 것은 런던의 해러즈 백화점 뒷골목 식당에서 일할 때였다. 손님들은 하얀 천이 깔린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지만 셰프들은 식당 뒤 주차장에 쭈그려 앉아 밥을, 아니 빵을 먹었다. 아침 7시부터 칼을 잡고 썰고 베고 찌르다 보면 어느덧 11시였는데, 그때 첫 식사를 했다. 메뉴는 늘 밀크티와 체다 치즈를 가득 올린 토스트였다. 웨이터들이 차와 우유를 준비하고 셰프들은 호밀빵 위에 심장마비를 부를 것 같은 규모로 치즈를 올려 오븐에 구웠다. 치즈가 지글거리는 토스트와 홍차에 하얀 우유를 컵 가득 붓고는 주차장 시멘트 바닥에 나앉았다.
셰프들은 취향대로 밀크티를 탔다. 홍차에 우유, 우유에 홍차. 영국 사람들에게는 이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보수당과 노동당으로 양분되는 정당 체제처럼 MIF와 TIF 두 패로 나뉜다. 풀어 쓰면 별거 아니다. ‘우유 먼저파(Milk in First)’와 ‘홍차 먼저파(Tea in First)’일 뿐이다. 이 문제는 2003년 영국왕립화학협회가 “우유를 먼저 넣고 그 위에 차를 따라야 우유의 열변성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친절하게 결론을 내려 줘 과학적으로 일단락됐지만 여전히 영국 사람들에게는 국론이 분열돼 있는 중요 이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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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날에도 이게 생각난다니까!”
매일 먹는데도 매일 감탄하는 셰프들. 나는 그 옆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이 토스트 두 개 먹을 때 세 개를 먹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셰프들이 먹는 식사는 손님들 음식보다 세공이 덜 들어가지만 그 맛과 만족도는 비할 게 아니었다. 든든한 포만감을 안고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밀크티 한 모금을 마시면 흰 우유 속에 수줍지만 선명한 홍차의 분홍빛 향기가 있었다.
흔히 홍차에서 장미꽃 향기가 난다고 하는데, 그것은 은유가 아니다. ‘지상 최고의 맛’의 저자 로완 제이컵스는 “한때 나는 어떤 와인 향, 이를테면 ‘라즈베리’ 향이라 묘사하는 와인 저술가들한테 짜증이 났다. 화학을 공부한 뒤 정말로 그 둘이 동일한 화합물임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그랬다”고 밝혔다. 마찬가지로 홍차의 장미꽃 향기는 진짜 장미향과 분자가 똑같다. 향은 한정된 수의 향 분자와 탄소 질소 산소의 조합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홍차 한 잔에 장미가 피어 있고 그이의 향기는 또 내 곁에 있다. 언제나, 어디서나.
홍차 향기에 가슴은 열리고 눈은 저절로 감긴다. 그 향기는 여기서 저기로, 시멘트 깔린 회색 주차장에서 숨소리가 들릴 듯 조용한 찻집으로, 고단함에서 그리움으로 나를 제멋대로 이끈다. 이윽고 정신이 아득해질 무렵이면 나를 깨우는 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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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케이!”
지금도 나는 그 향기가 그리워 가끔 밀크티를 탄다. 불그레한 홍차에 우유가 먹구름처럼 뒤섞이는 순간을 보며 가슴 밑바닥에 깔렸던, 공기 속으로 사라졌던 지난날의 향기에 빠져든다.
그나저나, 잘 있나요, 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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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현 셰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