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피아를 사랑한 스파이/이종관 지음/404쪽·1만7500원·새물결
작자 미상 ‘플라톤의 동굴’. 저자는 플라톤부터 시작되는 서구 철학사를 정리했다. 새물결 제공
애매한 직위에 우울해하던 주인공은 사표를 내고 국정원에 취직했다. 맡은 임무는 세계 경제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신에너지 이론을 고안한 독일인에게 접근해 이론의 전모를 파악해 오라는 것이다. 그 독일인이 철학과 교수여서 철학을 전공한 주인공이 임무를 맡게 됐다.
내용은 황당한 듯 보이지만 읽다 보면 첩보소설의 옷을 입힌 철학안내서다. 체코 프라하로, 이탈리아 시에나로 몸을 옮길 때마다 장소에 대한 사유가 펼쳐진다. ‘프라하라는 말은 체코어로 ‘문턱’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런데 하이데거의 말대로 문턱은 두 영역 사이를 가르며 동시에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상기하면서 프라하라는 이름에 풍경의 근원적 두 차원 즉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장소성이 암시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첩보 과정에서 기업의 최고책임자들을 만난 주인공은 논쟁을 벌이는데, 이 내용은 하이데거의 현대기술 비판이다. 연인과의 사랑도 동반되는데, 단순히 흥미를 북돋우는 역할이 아니다. 메를로퐁티와 후설 등 철학자들의 ‘몸의 철학’에 대한 성찰이 이어진다. 미국 라스베이거스로의 여정에 이르면 자본과 경쟁의 지옥에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문제를 던진다. 소설로서 매끄럽진 않지만 시도가 흥미롭다. 현실의 삶과 추상적 철학 관념을 연결하려 한 저자의 노력을 이해할 수 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