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운 문화부 기자
우선 선화공주가 실존 인물이라면 그가 의자왕의 어머니인가라는 의문부터 시작해 보자. 지금까지 확인된 문헌사료와 유물만 놓고 보면 의자왕의 어머니는 선화공주 혹은 사택왕후일 것이다. 그러나 알려지지 않은 의자왕의 생년(生年)을 추정해 보면 의외의 추론이 가능해진다. 그의 넷째 아들인 융이 서기 682년 68세의 나이로 중국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기록을 근거로 의자왕이 태어난 해를 역산해 보면 대략 595년 전후로 추산된다.
이때 아버지 무왕은 왕으로 즉위하기 이전의 한미한 신분이었다. 삼국유사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를 캐는 아이(薯童·서동)’로 불렸던 시절이다. 세도가에 의해 일약 왕으로 등극하기 이전까지 강화도에서 농사를 짓던 조선시대 철종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다시 익산 쌍릉으로 돌아가 보자. 선화공주가 묻힌 것으로 보이는 쌍릉 소왕묘는 그의 남편 무왕에 의해 조성됐다. 무왕 이전 백제 왕들은 그들의 왕릉을 수도 사비성이 있는 부여 능산리에 세웠다. 그렇다면 왜 굳이 수도에서 떨어진 익산에 왕릉을 지었을까.
실마리는 쌍릉 주변에 함께 조성된 왕궁리 유적과 미륵사지에 있다. 익산 왕궁리 유적에는 왕성 터는 물론이고 정원이 꾸며져 있는 기와집과 대규모 수세식 화장실 등 당시로선 첨단 시설물이 들어서 있다. 미륵사는 면적이 8만2644m²(약 2만5000평)에 달하는 엄청난 규모다. 이를 두고 학계는 무왕이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들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천도(遷都)를 계획한 것으로 본다.
이병호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무왕이 쌍릉 소왕묘를 익산에 세운 것도 이곳을 키우겠다는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두 달 뒤면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을 테마로 한 ‘익산 서동축제’가 열린다. 올해로 12년째인 지역축제다. 축제를 본 많은 사람들은 서동요의 러브스토리가 단순히 허구가 아니라는 사실, 아직도 규명돼야 할 미스터리가 많다는 사실에 짜릿한 흥분마저 느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