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정부 유라시아 구상과 맞고 경제 위기 돌파구가 될 AIIB 美 눈치에 선제적 선택 못하고 뒤늦게 끌려가듯 참가로 가닥 명분 쌓으려다 실리만 손해 가장 가까운 동맹국이라도 얼굴 붉혀야 할 땐 붉혀야
최병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지난해 7월 서울 한중 정상회의에 시진핑 주석은 AIIB 가입과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의 연내 타결 요구를 들고 왔다. 박근혜 대통령은 한중 FTA에는 화답했지만, AIIB에는 대답을 주저했다. 중국이 주도하는 AIIB를 반대하는 미국의 그림자 때문이라는 관측이 제기되었다. 설령 미국의 그런 요구가 있었더라도 한국 정부는 이때 전향적인 의지를 표명했어야 했다. 그간 공들여온 동북아지역 인프라 개발 구상과 맞아떨어지고, 박근혜 정부가 내건 유라시아 구상과도 맞고, 저성장 고착화 한국 경제의 위기 돌파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AIIB 구상은 도로, 철도, 항만, 공항, 통신, 전력 등 아시아지역 인프라 투자수요에 비해 자금 공급이 부족하다는 간단한 계산에서 출발한다. 세계은행이나 아시아개발은행(ADB)이 있긴 하지만 이들만으로는 부족하다. AIIB가 출범한다면 아시아지역의 인프라 개선에는 분명히 청신호가 켜진다. 미국은 중국이 최대 지분을 가지고 AIIB를 좌지우지하게 되면 그들이 주도해 온 국제경제 질서가 흔들린다고 판단했다. 독재국가, 비민주적인 국가들이 중국발 태풍권으로 들어가는 사태를 차단하고 싶어 했다. AIIB에 국제사회 기준에 맞는 지배구조를 요구하고, 미국의 동맹국들에는 AIIB 불참을 압박하게 된 배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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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팽할 것 같던 미국과 중국의 기 싸움은 미국의 가장 가까운 동맹국인 영국이 AIIB 참여를 전격 선언하면서 급격하게 중국 편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프랑스 독일 등 주요 서방국가 들이 연이어 참가를 선언했고 아시아지역 미국의 주요 동맹국인 호주도 가입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 만약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지 않았다면, 한국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물론 우려가 없는 것은 아니다. 미국 중심의 국제경제 질서에 비판의식을 가진 중국이 AIIB의 지분출자, 의사결정구조, 사무국 운영 등 지배구조를 그들 입맛대로 요리하겠다고 나서는 것은, 시어머니의 가혹한 시집살이에 휘둘리던 며느리가 나중에 자신 역시 똑같이 시어머니 노릇을 하려 드는 격이다. 중국이 스스로 신형 경제대국으로 부르는 그 이름에 걸맞은 행보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선택은 중국이 지금까지 짜놓은 판에 막판에 합류하는 것이 아니라 더 선제적이고 전략적이었어야 했다. AIIB의 사무국을 중국이 아닌 한국에 유치한다는 협상카드는 제대로 써보지도 못했다. 지배구조 개선을 유도하고 중국 역시 일방적이라는 따가운 시선을 줄이고, 더 많은 국가들의 참여 확보를 이끌어낼 수 있는 ‘신의 한 수’일 수도 있었는데 말이다. AIIB가 한중 FTA와 한국의 경제외교 청사진에서 연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국익을 위해서라면 가장 가까운 동맹국과도 때론 얼굴을 붉힐 수 있어야 한다.
최병일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