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덕영 국제부 기자
과거엔 세계적 현자(賢者)들도 노예제를 정당화했다. 기원전 4세기 고대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태어날 때부터 지배당하도록 돼 있는 사람들이 있다”며 노예제를 옹호했고, 1452년 교황 니콜라오 5세는 교황칙서인 ‘둠 디베르사스’를 통해 ‘사라센인과 비기독교도를 세습 노예로 삼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노비 제도는 공식적으로 폐지됐지만 이후에도 상당 기간 노비는 사실상 존재했다. 이후 인권의 개념이 발달하면서 국제 조약과 법률에 의해 현재는 더이상 공식적으로 ‘노예’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노예제를 옹호했던 니콜라오 5세의 58번째 후임인 프란치스코 교황이 전임자의 의도와 정반대로 ‘노예’를 새해 화두로 던졌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새해 첫 미사에서 “오늘날 많은 사람이 다양한 방법으로 착취당하고 있다”며 “전 인류가 강제 노역과 인신매매 같은 현대적 형태의 노예제에 맞서야 한다”고 말했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보면 다른 사람들을 ‘노예’로 대하는 이들이 적지 않은 것 같아 씁쓸하다. 주차 아르바이트생을 무릎 꿇린 ‘백화점 모녀’도, 승무원을 비행기에서 내리게 한 ‘땅콩 부사장’도 상대를 인간답게 대하지 않았다. 스스로 상대방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손님은 왕’이라는 말은 불편하게 느껴진다. 직원들이 손님을 친절하게 대하겠다는 의도일 텐데, 손님 스스로 왕이 되려는 사람이 적지 않다. 스스로 왕이 된 손님은 직원들이 노예처럼 비굴해지길 바라는 듯하다. 돈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고, 돈을 벌기 위해 직장에 계속 다녀야 하는 직원들의 처지를 악용하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 같아 서글프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더이상 노예는 없다. 형제고, 자매”라고 말했다. 직원은 노예가 아니다. 그들이 직장을 나서면 형제고, 자매다. 손님도 왕이 아니다. 그저 손님 대접만 받으면 족하다.
유덕영 국제부 기자 fire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