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윤 한양대 정책과학대 교수
어느 사회나 갑은 존재한다. 갑질은 갑도 못되는 사람이나 집단이 갑의 행세를 하는 것이다. 이 행세가 통하는 사회가 있고 그렇지 않은 사회가 있다. 우리 사회는 왜 갑질이 통하는가? 합리적이고 공정한 생활이 가능하다면 왜 이런 갑질을 국민이 받아주겠는가? 법과 제도가 국민의 등을 이렇게 떠밀고 있다. 법률과 제도가 불확실하고 모호하며 즉흥적이고 많은 경우 사실상 지키려야 지킬 수 없다. 국회와 정부가 이런 제도의 독점적인 공급자이다. 문제가 생기면 의원들은 관료들의 무능하고 불성실한 집행을 손가락질하고 관료들은 의원들의 저질 법률을 수군댄다. 외견상은 그렇다. 그러나 이 관들은 부지불식간에 내통하여 저질의 제도를 공동 제작한다. 의원들의 법률 제정 과정에 관료들이 적극적으로 관여한다. 의원들은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법률을 일회성으로 소비한다. 관료들은 그 법률로 창출된 정책과 규제를 체계적으로 활용한다. 조직이 확대되고 승진잔치가 벌어지며 퇴직 후에는 관피아로 그 노력을 보상받는다. 이러한 결과를 양측이 모르고 했을 수도 있다. 소위 ‘착한 의도, 나쁜 결과’라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처음부터 착한 의도가 아니었다. 착한 가면 아래 숨겨져 있는 특정한 이익을 도모하는 경우가 많다. 모르고 했다면 슬프도록 처절한 무식이요, 알고 했다면 극도의 가증스러운 양심불량이다.
문제는 관들의 갑질에는 통상 특정한 ‘을’이 없다는 것이다. 통과세나 산적세의 속성이 그렇다. 다른 말로 하면 숙주에 기생하는, 즉 ‘기생적’ 갑질이다. 기생적 갑질은 일반적인 갑질보다 그 폐해가 더 크고 파장이 길다. 인맥주의, 부정한 담합, 만연한 불법 행위 등이 그 폐해의 일단이다. 세월호의 대담한 과적에도 경쟁업체들의 신고가 없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가? 업체들이 담합했다. 전율할 일은 그 담합의 조율자는 규제 권한을 쥔 부처 출신 전직 관료들이었다. 관이 주도하는 수많은 조율과 협업이 건전한 시민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관을 중심으로 새로운 당파와 인맥이 부활했다. 우리 사회 어디에나 산재하고 있는 수많은 불법과 탈법도 같은 이유로 신고되지 않는다. 무시무시한 잠재적 사고들이 무시되고 있다.
김태윤 한양대 정책과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