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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명의 관객에 1000개의 이야기가 되어…

입력 | 2014-12-30 03:00:00

‘에르메스재단 미술상展’… 장민승 전시실에 가보니




장민승 씨(왼쪽)와 그의 영상 작품 ‘검은 나무여’의 스틸 컷. 일본 단시(短詩) 하이쿠를 수어로 표현했다. 왼쪽부터 ‘파도는 차갑고…’, 서곡 중 퍼포먼스, ‘먼지 한 점 없어라’. 음악에 섞인 파도와 방울 소리는 지난달 밤 전남 진도군 팽목항에서 담아 왔다. 에르메스 코리아 제공

무심하게 나열한 기사 속 정보는 때로 독자에게서 대상의 본질을 직시할 기회를 뺏는다. 내년 2월 15일까지 서울 강남구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열리는 ‘2014 에르메스재단 미술상전’을 관람할 예정이라면 지금 이 글 읽기를 멈추고 아무 정보도 구하지 않은 채 찾아가 보길 권한다.

올해 15회째인 이 미술상전은 매년 작가 3명을 선정해 작품 제작과 전시를 지원하고 행사 말미에 대상 수상자를 발표한다. 올해는 슬기와 민, 여다함, 장민승 3팀이 기회를 얻었다. 셋으로 나뉜 전시실 가장 안쪽에 장민승 작가(35)의 이야기가 놓여 있다.

‘검은 나무여, 예전엔 흰 눈 쌓인 나뭇가지였겠지.’

10초 내로 물에 녹도록 가공한 종이 조각에 실크스크린으로 하이쿠(俳句·짤막한 일본 시)를 한 줄씩 새겨 좁은 진입로에 드문드문 조약돌을 얹어 걸었다. ‘둘이서 보았던 눈, 올해도 그렇게 내렸을까.’ 흔해 빠진 옛사랑 타령이려니 심드렁한 마음으로 통로 끝에 이르니 잠시 앉아 다리 쉴 작은 의자와 움직이는 밤바다 영상이 열려 있다.

“부산국제영화제 시그널 영상에 쓰려고 찍은 2013년 어느 밤 부산 앞바다다. 영화제에는 90초로 편집해 썼지만 전시에서는 89분 51초 전체 영상을 시작도 끝도 없이 연속 상영한다.”

달빛이 드문드문 물결 위를 미끄러지듯 흐르고, 낮게 깔린 구름 새를 무리 벗어난 갈매기가 허겁지겁 스쳐 간다. 분명 아름다운 광경인데 물끄러미 바라보자니 문득 처연해진다. 영화제 사무국은 지난해 쓴 이 시그널을 올해는 사용하지 않았다. 장 씨는 “바다라는 대상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달라졌음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옆방 구성은 판이하다. 65인치 화면 속 바다를 들여다보다 350인치 스크린 중앙에 홀로 선 여성 연기자를 마주하니 묘한 긴장이 인다. 여인은 표정 없이 수어(手語)로 무언가를 전한다. 25분 길이의 영상이 후반부로 갈수록 얼굴은 사라지고 두 손의 움직임만 보는 이의 얼굴을 움킬 듯 바짝 다가든다. 작곡가 정재일의 음악에 파도 소리 방울 소리가 섞여 스피커를 찢어 낼 듯 달아오른다. 오싹한 공포인가 싶더니 차츰 눈물이 고인다.

“4월 16일 세월호 속보가 TV에서 흘러나올 때 재일이와 닭집에서 술을 먹고 있었다. 괴로움과 부끄러움을 견디기 어려웠다. 하이쿠 6편을 수어로 바꾼 뒤 다시 그 수어를 한국어로 번역했다. 수어는 표현이 제한적이다. 하이쿠의 ‘타버린 숯’은 그래서 ‘검은 나무’로, ‘국화’는 ‘흰 가을 꽃’이 됐다. 작품 모티브가 뚜렷이 알려지길 바라지 않는다. 1000명의 관객이라면 1000개의 이해가, 번역이 있길 원한다.”

장 씨는 중앙대 조소과 재학 중 영화음악 제작과 가구 디자인으로 일찌감치 기성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서른을 앞두고 “시선과 고민의 얄팍함을 절감해” 자신의 미술 언어를 본격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수어 영상 ‘검은 나무여’는 14명의 스태프가 10월 3일 오후 한 번 만에 찍었다. 10년 전 사귄 여자친구가 이민 간 독일에서 날아와 안무를 맡았다. 장 씨의 표현 도구는 영상 말미 크레디트 위 사람들인 것. “직업을 정하고 싶지 않다. 다음에는 극영화를 만들지도 모르겠다. 영역이 정하는 한계에 구애받고 싶지 않다.” 그는 영화감독 장선우의 외아들이다. 너른 미간, 빼닮았다. 02-3015-3248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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