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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훈동 빌딩은 봉황이 알을 품는 자리”… 지관까지 동원

입력 | 2014-11-29 03:00:00

[憧憬 동경 이종찬 회고록]〈15〉 민정당 창당과 민족 논쟁




1981년 1월 10일, 민정당 창당대회를 앞두고 전두환 대통령에게 신당 가입과 당 총재직 수락을 건의하기 위해 청와대로 향하는 이재형 창당 준비위원장(왼쪽)과 권정달 사무총장 내정자. 유석현 선생이 주비위원장을, 운경이 준비위원장을 맡았다. 동아일보DB

1980년 11월 28일 겨울이 벌써 왔는지 찬바람이 맵게 불었다. 하지만 날씨는 맑고 청명했다.

서울 퇴계로의 옛 무역회관 입구에서는 아침부터 기자들과 카메라맨들이 부산하게 움직였다.

“왜 하필 무역회관에서 창당 첫 모임을 여는 거지?”

“아마 경제제일주의를 부르짖을 모양이지.”

“아냐, 정의사회를 부르짖으면서 호화스러운 호텔은 피해야 하겠고, 적당한 장소가 없는 것이겠지.”

오전 9시 정각. 5·16때 ‘민족일보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백발이 성성한 송지영 선생과 독립운동 원로인 유석현 선생이 함께 들어섰다.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자 두 분은 마치 시집온 새색시처럼 부끄러워했다. 이어 최영철 전 공화당 대변인, 박권흠 전 민주당 대변인이 도착했고, 이찬혁 전 한국노총위원장, 이헌기 전 한국노총 사무차장이 뒤를 이었다.

일생을 민족의 자주와 독립을 위해 바친 애국지사들의 우산 밑에 초당적인 인사들이 새 정치의 장을 열고자 모인 것이다. 여기에 오랫동안 혁신운동에 몸 바친 윤길중 선생, YWCA운동에 헌신해 온 김현자 여사, 육사8기생 예비역 3성 장군인 이범준, 재벌 오너가 아닌 전문 경영인으로 정수창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참여했다. 그리고 서정시인인 진짜 선비 김춘수 교수, 그리고 정치학계의 큰어른인 이용희 전 통일원장관…, 이렇게 각계를 대표하는 분들을 모두 망라했다.

먼저 유 선생을 주비위원장으로 추대하는 순서였다.

그 순간 유 선생은 미리 준비해온 유인물을 주비위원들에게 나눠줬다. 그분이 고뇌에 찬 입장에서 정치에 참여하게 된 이유를 밝힌 ‘담화’였다.

그런데 권정달이 나서서 그 담화를 전부 회수하고 “잡음이 나면 회의를 그르치게 됩니다”라며 언성을 높였다. 유 선생은 무안을 당한 셈이다.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노(老)혁명가가 이제 말년에 처음으로 정당에 참여했는데, 그 심경을 저렇게 무시할 수 있을까? 거 참, 어른도 알아보지 못하는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군! 저런 놈들과 같이 일해야 하나….” 내가 먼저 박차고 일어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나 역사적인 창당 준비위원회가 더 중요했다. 나는 꾹 참았다.

이어 권정달이 창당취지문을 읽었다.

“우리 발기인들은 새로운 민족, 민주, 복지, 정의사회를 구현하고 겨레의 염원인 조국통일의 꿈을 기필코 이루어 나가려는 새 시대의….”

취지문은 박경석 대변인과 그와 같이 동아일보에서 일하던 황선필, 유경현 이런 분들이 거들어 작성한 글이었다.

당의 이념과 강령작업이 대략 성안이 된 어느 날 새로운 복병이 생겼다. 5대 강령으로 설정한 ‘민족’ 문제에 대하여 이의가 제기된 것이다. 민족을 넣느냐, 빼느냐. 신군부내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허화평, 허삼수, 허문도는 넣자는 주장이고, 권정달은 빼자는 쪽이었다.

권정달은 우리 작업과는 별도로 소그룹을 만들어 강령작업을 해왔던 것 같다. 거기서 총대를 멘 서울대 교수 배성동 씨가 이의를 제기한 것이었다.

“민족 문제는 굳이 당 강령으로 넣지 않아도 민주주의나 통일문제에 모두 배어있습니다. 오히려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습니다.”

“다른 오해라니요?”

“꼭 찍어서 말하기 어렵지만 과도한 국가주의로 오해받을 수도 있습니다.”

파시즘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는 얘기 같았다. 내가 나설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양보하지 못하겠어요. 우리가 민족문제에 대하여 소홀히 다루면 신당창당은 무엇 때문에 합니까? 지금 젊은이들은 ‘자주’라든가 ‘외세’ 문제에 민감하지 않아요? 적어도 이런 국민정서에 맞는 정치를 하려고 한다면 당연히 민족문제에 대해 우리 나름대로 정리해 놓아야 합니다.”

다음날 아침 창당준비 조찬회의에서 이 문제는 다시 제기됐다. 전두환 대통령을 직접 만나 신당의 대표위원 자리를 수락한 운경 이재형 선생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있다가 확실하게 결론을 내렸다.

“현재 만들어진 당의 강령과 정책이 모든 의견들을 잘 종합하여 만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대로 채택하고 창당대회에 내놓읍시다.”

그 후 유석현 선생의 방에 들렀더니 송지영, 이건호, 최호진, 윤길중 여러분들이 계셨다. 그분들은 이구동성으로 나에게 용기를 주었다.

“민족문제를 소홀히 다루면 안 됩니다. 민족주의다, 이렇게 말하면 아마 서양에서 공부한 사람들은 거부반응을 일으킬지 모르지요. 이런 게 모두 이승만 정권 때부터 잘못된 것이에요. 계속 밀고 나가세요.”

마지막으로 남은 게 당사 문제였다. 서울시내 유명한 지관에게 물어본 결과 관훈동 빌딩이 봉이 알을 품는 자리라는 제언을 받았다.

그런데 관훈동 빌딩은 당시 보험협회가 소유하고 있다가 이를 함경도 출신의 유명한 부동산 거부 L 씨에게 매도하기로 계약을 체결하고, 이미 계약금까지 받은 상태였다.

L 씨를 만나 사정을 이야기했다.

그분은 선뜻 응낙했다.

“새로 창당하는 집권당이 영광스럽게 내가 살 건물이 제일의 복지(福地)라고 생각하고 꼭 필요하다고 하니, 나라가 잘된다면 얼마든지 협조하지요.”

당사 문제는 그렇게 해결됐다.

▼ 공화당의 정구영, 민정당의 이재형 ▼

“민주주의 하겠다”며 이재형 대표 영입… 창당 뒤엔 “무슨 절차를 그렇게 따지나”


10년간 야인(野人)으로 있던 운경 이재형(1914∼1992)은 결국 전두환 대통령을 만나고 나서 민정당(민주정의당) 합류 결심을 굳힌다.

운경(雲耕)은 자서전에 이렇게 기록해 놨다. “청와대에 들어가 ‘내가 돕는 일은 민주주의뿐인데 각하가 정말로 민주주의를 하실 의향이 있으십니까?’라고 했더니 전 대통령이 ‘바로 그것입니다. 꼭 이 땅에 민주주의를 심고 싶습니다’라고 하더군. 그래서 내 흔쾌히 약조를 했던 게야.”

이종찬은 이종찬대로 걱정이 없지 않았다. ‘이재형 선생이 과거 공화당 시절 정구영 선생의 재판(再版)이 돼서는 안 된다.’ 그는 권정달과 함께 운경을 만나고 온 다음 청와대에 이런 요지의 면담보고서를 작성해 올렸다.

운경 이재형을, ‘마주하면 선생님 소리가 절로 나온다’는 청람 정구영 선생(1894∼1978)과 단순 비교한다는 건 극히 조심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두 사람이 처했던 정치적 상황엔 닮은 점이 적지 않다.

청람(淸嵐)은 지조 높은 선비이자 법조인이었다. 3·15 부정선거 직후, 경찰이 마산 시민들의 시위를 좌익 폭동으로 규정하자 당시 대한변협 회장이었던 청람은 진상조사단을 파견해 이승만 정권에 경고장을 보냈다. 박정희는 공화당을 창당하면서 그런 청람이 필요했다. 청람은 초대 총재를 맡아 박정희 쿠데타 정권의 우산이 돼줬다.

전두환 정권에 운경은 바로 박정희 정권의 청람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을 추진하며 독재의 길을 걷자 청람은 법과 정의,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반대에 나섰다. 박 대통령과 권력실세들의 핍박이 이어졌지만 그는 굴하지 않았고 결국 공화당을 탈당해 민주회복투쟁에 합류한다.

운경을 둘러싼 민정당 상황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재형 대표의 보좌역(비서실장)을 맡았던 장경우 전 의원은 시사플러스에 연재한 회고록에서 이렇게 썼다.

“이재형 선생만큼 ‘국회의원의 권위’를 되찾기 위해 노력했던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국민의 대표를 무섭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선생의 철칙이었다. 그러나 당시 민정당 안에는 ‘국회의원은 당이 뽑아 준 사람’이라는 생각이 팽배해 있었다. 그때부터 당의 실세들과 선생의 기나긴 싸움이 시작됐다.”

보안사 출신의 이상재 사무차장이 당 소속 의원들에게 “당신들은 말이야. 왜 국회의원 배지만 달고 당 배지는 안 다는 거야? 당이 국회의원에 당선시켜줬다는 사실을 모른다는 거야?”라고 호통을 치던 때였다.

특히 권정달 사무총장은 운경을 향해 “저 영감은 무슨 절차를 그렇게 따지나. 정말 죽겠구먼!”이라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김창혁 전문기자 cha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