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토요일에 만난 사람]‘화제만발 컬렉터’ 김창일 아라리오 회장

입력 | 2014-11-15 03:00:00

홍삼 같은 작품을 산삼처럼 만드는 이 남자




서울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 옆 유리로 된 레스토랑 건물 안에 선 김창일 아라리오그룹 회장. 그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땐 내 ‘촉’을 믿는다. 누군가와 상의해 이성적으로 판단한 일은 절반이 실패로 돌아갔다”고 했다. 그의 ‘촉’은 “5년 안에 제주에 미술관 9개를 지으라”는 지시를 내렸다. 전영한 기자 scoopjyh@donga.com

그에겐 ‘촉’이 있다.

주식을 사면 주가가 뛴다. 시름시름 앓던 기업도 그가 손보면 황금알을 낳는다. 충남 천안의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시작해 백화점 멀티플렉스 갤러리까지 연매출 3500억 원의 중견기업인 아라리오그룹을 일궈낸 김창일 회장(63).

사람들은 그의 촉을 부러워하고 타고난 사업가라고 인정한다. 그런데 그가 사업적 촉을 점잖은 미술계로 뻗치자 부러움과 인정은 시기, 비판과 섞이기 시작했다. 1978년부터 36년간 약 3700점의 미술품을 모아 세계적인 컬렉터가 되는 동안 “천안 졸부가 미술 시장을 흔든다”는 말이 나왔다. 컬렉터라면 간송 전형필은 못 되어도 비슷하긴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씨킴(CI Kim)’이라는 예명으로 2003년 첫 개인전까지 열자 쑥덕거림은 커졌다. 지난해 한국 최고의 현대건축물로 꼽히는 김수근(1931∼1986)의 공간 사옥을 인수했을 땐 “장사꾼에게 넘어갈 물건이 아닌데…”라는 우려가 나왔다.

올가을 그는 서울과 제주에 현대미술관을 4개나 개관하면서 다시 한 번 화제의 중심에 섰다. 올해 9월엔 공간 사옥을 리모델링한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를, 지난달엔 제주시 탑동로의 극장과 자전거 상가, 산지로의 모텔을 새로 단장한 ‘아라리오 뮤지엄 탑동시네마’ ‘…탑동바이크샵’ ‘…동문모텔’을 개관했다. 내년 3월엔 산지로에 미술관이 하나 더 문을 연다. 천안과 서울, 중국 상하이에는 아라리오 갤러리가 있다.

백남준, 앤디 워홀, 데이미언 허스트, 마크 퀸, 키스 해링, 신디 셔먼 등 미술관을 가득 채운 그의 컬렉션을 보면 입이 떡 벌어진다. “전시에 졸가리가 없다”는 냉정한 비판보다는 “좋은 작품 정말 많이 모았네”라는 놀라움이 앞선다.

천안의 집과 제주 작업실에서 지내다 모처럼 서울에 온 김 회장을 서울 종로구 율곡로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에서 만났다. 청바지와 후드티, 카키색 사파리를 무심한 듯 걸쳤지만, 복숭아뼈가 보이도록 맨발에 신은 로퍼가 “실은 신경 좀 썼어”라고 말해주었다.



“주식 부동산 말고 그림만 산다”

―컬렉션도 대단하지만 기가 센 현대미술에 밀리지 않고 어울려주는 건물이 걸작임을 절감한다. 건물 곳곳의 창으로 들어오는 풍경은 작품보다 더 아름답다.

“10년 전 이상림 공간건축 대표의 제의로 이곳에서 특강을 하면서 처음 와 봤다. (지난해 공간건축이 부도나 사옥이 매물로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난 300억 원 정도 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런데 공매 최저가가 150억 원이었다. 공매가 유찰됐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이 대표를 만나 ‘150억 원에 달라’고 했다. 유찰되면 할인해주는데 이런 건 깎는 게 아니다.”

―미술관 옆 유리 건물인 신관의 카페와 레스토랑에선 창덕궁이 내려다보인다. 이곳을 사무실로 썼던 공간건축 사람들은 ‘유리 건물이라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춥다’며 불편해했는데, 일반인도 드나들 수 있는 상업시설이 되니 건물이 더 좋은 쓰임새를 만난 듯하다.

“신관이 없었으면 구관(미술관)도 죽었을 것이다. 설계자인 공간건축의 2대 대표인 장세양 선생(1947∼1996)에 관한 책을 출간할 계획이다. 미술관 개관하면서 레스토랑에 신경을 많이 썼다. 미술관은 식당이 포함된 개념이다. 좋은 작품 보고 충격받은 뒤 레스토랑서 커피 마시며 음미하는 거다. 지하 빵 공장에서 빵도 직접 굽는다. 식당은 내 주 전공이다. 그동안 식당 25개를 직영해 봤다.”

건축가 김수근의 공간 사옥을 리모델링한 ‘아라리오 뮤지엄 인 스페이스’(위), 담쟁이로 뒤덮인 미술관 옆 유리 건물은 건축가 장세양이 설계한 공간 사옥 신관으로 지금은 레스토랑이 들어섰다. 아래는 제주시 탑동로의 극장 건물을 리모델링한 ‘아라리오 뮤지엄 탑동시네마’. 아라리오뮤지엄 제공

―제주에만 미술관이 4개다. 작업실도 제주에 있다. 왜 제주인가.

“제주는 거리의 야생화까지 모든 게 예술이니까. 앞으로 5년 안에 제주에 미술관을 9개 개관한다. 제주는 사람들이 마음먹고 가는 곳이어서 계획을 세워 집중적으로 돌아다닌다. 미술관 근처에 카페와 레스토랑을 함께 운영해 사람들이 찾아오게 만드는 거다.”

―서울과 제주에 최근 개관한 미술관 모두 신축이 아니라 리모델링한 것들이다.


“신축할 경우 설계는 멋진데 전시엔 나쁜 공간이 나오기 쉽다. 버려진 건물을 내 컬렉션으로 재생하는 데 관심이 있다. 탑동시네마는 2005년 폐관했는데 2006년 경매 때 23억 원에 응찰했다 떨어졌다. 2012년에 19억 원에 샀다.”

―제주에 미술관과 레스토랑을 위해 건물을 여러 채 샀다고 들었다. 부동산 투자에도 ‘촉’이 있는가.

“난 내가 쓸 건물만 산다. 투자용으로는 안 산다. 군 제대 후 대학 재학 시절 주식으로 수천만 원을 벌었다. 그 돈으로 술 마시고 흥청망청 살았는데 그때 생활이 악몽 같았다. 증권이나 부동산에서 나오는 공돈은 인생을 망친다. 마음 자세 하나하나가 씨가 돼 자라는 것인데…. 그래서 주식이나 부동산은 안 한다.”

“나쁜 그림은 빨리 팔고, 좋은 그림은 산삼 만들라”

그는 천안 갑부로 알려져 있지만 서울이 고향이다. 서울서 휘문고와 경희대 경영학과를 다녔다. 대학 졸업 후 어머니가 빚 대신 받은 천안 고속버스터미널의 운영을 맡으면서 천안 사람이 됐다.

“당시 터미널 사업은 사양 업종이었다. KTX가 생기고 자가용 시대가 올 테니 터미널은 전망이 어두웠다. 나는 매점 직영이라는 카드로 적자 터미널 사업에서 억대를 벌기 시작했다.”

―연고도 없는 곳에서 사업하느라 힘들지 않았나.

“세상을 넓게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도시가 작으니 시청의 고위직 공무원이나 국회의원과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고, 많이 배웠다.”

―예전에 본보와의 인터뷰에서 ‘아날로그 시대엔 금과 부동산을 사들였지만 디지털 시대엔 미술작품이 금이다’라고 했다.

“매년 20억∼30억 원 들여 작품을 산다. 한때 회사 운영이 어려웠을 때 직원들이 팔자는 제의를 했지만 구입한 미술품의 98%는 안 팔았다.”

―실패한 컬렉션은….

“다섯 중 하나꼴.”

―컬렉션은 어디에….

“천안 목천읍에 지하 1층, 지상 3층 약 1만 m²(약 3000평) 규모로 수장고를 지었다. 매년 유지비로 5억 원이 든다.”

김 회장은 미국의 유명 미술잡지 ‘아트뉴스’가 선정하는 세계 200대 컬렉터 명단에 올해까지 7년째 이름을 올렸다. 한국인으로는 유일하다. 그에게 ‘미술품 컬렉션을 하려는 이들에게 조언을 해달라’고 하자 말이 빨라졌다.

“첫째, 최고의 작품을 사야 한다. 그러면 손해 보는 일이 없다. 같은 작가의 작품도 다 다르다. 작가를 선택했으면 그의 최고작을 골라야 한다. 100에 99는 작가가 아니라 작품을 잘못 고른 것이다.

둘째, 깎지 말고 사라. 제주 동문모텔 미술관에 전시된 디노스와 제이크 채프먼 형제의 독일병정들(‘자본이 고장났다!예스?노!바보!’)은 홍콩아트페어 화이트큐브에서 100만 달러(약 11억 원) 주고 샀는데 나중에 800만 달러까지 갔다. 제이크에게 ‘사겠다’고 했더니 ‘다른 사람이 먼저 15% 디스카운트(할인) 조건으로 샀다’고 했다. 난 ‘노 디스카운트’를 불렀고 5분 만에 샀다. 세월이 지나면 이때 할인율은 아무 의미가 없다.

셋째, 나쁜 작품은 ‘사주세요’ 하지만 좋은 그림이란 기다리지 않는다. 우리가 기다려야 한다. 공간 사옥 살 때 모두 반대했지만 난 ‘지금 안 사면 평생 후회한다’며 질렀다. 기회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넷째, 나쁜 그림은 빨리 팔고, 좋은 그림은 홍삼에서 산삼으로 만들어야 한다. 홍삼은 몇십만 원이지만 산삼은 억대 이상을 받을 수 있다. 장미셸 바스키아 작품을 50만 달러에 샀는데 1년 반 만에 80만 달러가 되고, 다시 1년 후 500만 달러가 됐다. 탑동시네마 미술관에 전시한 앤디 워홀의 ‘메릴린 먼로’는 10년 전 20만 달러에 팔았는데, 미술관에 꼭 필요해서 지난해 크리스티 경매에서 240만 달러 주고 샀다. 결국 그림이건 부동산이건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긴다.”



“그림에 빠지면서 내 삶은 윤택해졌다”

그는 현대미술 작가다. 2년에 한 번씩 여름마다 천안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갖는다. 아라리오 미술관에는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과 함께 본인의 작업들도 전시했다. 개관 기념 기자회견에서는 “자기 미술관에 자기 작품을 전시?” “그것도 대가들 작품과 나란히?”라는 질문이 나왔고 그는 “논란이 된다는 점은 알지만, 그(내 작품)에 대한 평가는 지금은 아니다”라고 답했다.

“나는 학교에서 배우진 않았지만 수많은 레스토랑을 부수고 만들고 하면서 예술을 배웠다. 해외 레스토랑 다니며 조사 연구하는데 사진을 못 찍게 하니 대신 드로잉을 수없이 했다. 현대미술은 라이선스가 필요하지 않다. 미술가가 학교에서 탄생하는 시대가 아니다. 아티스트는 돌연변이 식으로 생기는 것이다. 내가 도둑질하는 것도 아닌데 욕한다. 오히려 격려해야 하는데….”

―본인 작품도 팔아 봤나.

“국내외 몇 곳에서 구매 제안을 해왔지만 거절했다. 내가 내 작품 팔면 ‘작전일 거다’라며 수군댈 것이다. 내 가까운 사람들이 힘들어지는 게 싫다. 행복이란 내가 행복한 게 아니라 내 가까운 사람들이 행복감을 느끼는 것을 보는 것이다. 확실한 건 그림 그리고 미술에 빠지면서 내 삶은 윤택해졌다는 거다.”

소더비를 세계 최대의 미술품 경매회사로 키운 피터 윌슨 회장은 “소유하고 싶은 마음 없이 작품을 감상하기란 어렵다. 인간의 탐욕이 없다면 미술은 이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했다. 그만큼 컬렉터가 미술 발전에 중요하다는 얘기다.

김 회장은 “언젠가는 재단을 만들 것이다. 그러면 내 컬렉션은 공공의 것이 된다”라고 했다. 그렇게 된다면 “씨킴이 한국 미술계 발전에 기여한 게 무엇이냐”는 목소리도 쑥 들어갈 것이다.

이진영 기자 ecolee@donga.com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