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연욱 정치부장
영국 노동당은 1979년 총선부터 치르는 선거마다 보수당에 졌다. 노동당의 새 당수 키녹은 1986년 전당대회에서 당의 상징을 붉은 장미로 바꿨다. 당내 극좌세력이 높이 든 ‘붉은 깃발’을 폐기한 것이다. ‘제3의 길’을 주창한 블레어가 당수로 선출된 것은 다시 7년이나 지나야 했다. 사회주의 색깔이 짙은 국유화 강령의 당헌 4조를 개정하는 등 ‘신노동당 선언’을 내걸었다. 노동당의 연패 행진은 1997년 총선에서 겨우 마침표를 찍었다. 노동당이 연패의 늪을 벗어나는 데 18년이나 걸린 셈이다.
2007년 대선은 노무현 정권의 열린우리당에 대한 국민의 심판이었다. 열린우리당 강경파 그룹의 ‘민낯’은 국가보안법 폐지 투쟁에서 그대로 드러났다. 당시 당 의장이었던 이부영은 ‘여야 당 대표-원내대표’ 4자 채널을 가동해 보안법 폐지가 아닌 개정의 절충안을 이끌어냈다. 보안법 중 찬양 고무 등 논란이 된 일부 조항을 손보자는 것이다. “보안법을 사수하라”는 목소리가 강한 야당(한나라당)의 강경 기류를 감안하면 협상 성과는 평가할 만했다.
“(여야 사정을 무시하고) 친노세력이나 재야세력은 노 대통령 말대로 왜 안 하느냐고 했다. 결국 다 날아갔다. 지금 보안법은 그대로 살아있다. 여야 합의가 깨져버리면서 다 끝나버렸다. 당시 박근혜와 여러 차례 만나 ‘민주화를 위해 사상, 결사의 자유를 탄압하는 것은 거둬내고, 안보 문제는 보수 세력이 안심하게 해주는’… 그때 최상의 선택이었다고 봤다. 그걸 다 낙동강 오리알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이후에도 별반 달라진 것은 없었다. 열린우리당의 뒤를 이은 민주당은 2012년 총선을 앞두고 통합진보당과 야권연대를 밀어붙였다. 노무현 정부가 역점을 기울였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하는 자기부정(自己否定)의 길을 걸었다. 당시 국회의원 공천을 앞두고 ‘정체성’ 검증을 하겠다는 웃지 못할 코미디까지 벌어졌다.
2012년 대선 패배 후 영화 ‘레미제라블’에 야권 지지자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영화 속 ‘혁명’ 장면을 보며 허탈한 마음을 달랬다. 이들은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에 “꿈을 잃지 말자”는 글을 올리며 공감대를 넓혔다. 7·30 재·보궐선거 참패 이후 10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 ‘명량’이 ‘힐링’ 소재가 된다고 한다.
열린우리당부터 지금의 새정치민주연합으로 간판은 바꿔왔지만 패배와 반성은 되풀이됐다. 하지만 반성은 요식행위에 그쳤고, 계파정치의 폐해는 그대로 이어졌다. 강경파의 목소리는 여전히 말없는 다수를 압도하고 있다. 11일 새정치연합의 의원총회에서 여야 원내대표 합의안이 거부된 것은 열린우리당 시절을 떠올린다면 ‘이변(異變)’이 아니다.
정연욱 정치부장 jyw1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