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은 사회평론가
부쩍 나이를 먹었다고 생각될 때가 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내 경우는 택시 운전사 아저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때가 그랬다. 목적지까지 가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는데 놀랍게도 꽤 편안했다. 대체 낯선 사람에게 왜 내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20대 때와는 딴판이다. 전혀 모르는 낯선 이가 툭 던진 질문이 내 마음에 파문을 만든 걸까? 아무리 가까운 사이여도, 가깝기 때문에 오히려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기 마련이고 그래서 우리는 가끔 다시 만날 일 없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더 깊은 속내를 이야기하게 되나 보다.
감정 노동이 보편화하면서 겉으로는 항상 웃고 다니지만 속마음은 우울한 ‘가면 우울증’(스마일 마스크 증후군)에 시달리는 사람이 늘었다고 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놀러간 이야기를 올리지만 정작 자신의 속마음은 올리지 못하는 사람들이 넘쳐난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어도 힘든 얘기, 어려운 얘기를 자주 하거나 섣불리 징징댔다가는 상대방의 기운을 빼앗는 ‘에너지 뱀파이어’로 찍히거나 “또 어려운 얘기 한다”고 타박 맞기 딱 좋다. 상대방의 힘든 이야기를 들어주기에는 나도 그럴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으니까. 차라리 누군가의 뒷담화를 하고, 흉을 보는 건 괜찮아도 힘든 이야기를 늘어놓는 건 딱 질색이라는 사람도 많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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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지내?” 물어보면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일단 “그럼, 잘 지내지. 고마워”라고 답해야 하는 영어의 관용 표현 같은 대화가 도처에서 들려온다. 그런 틀에 박힌 반응조차 귀찮아지면 우리는 마치 바쁜 일이 있다는 듯이 손 안의 구세주,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린다. 갈 곳 없는 말과 동의를 구하는 눈빛은 허공을 떠돌고, 사람들은 같은 공간에 있지만 각자의 스마트폰이 연결해주는 자신만의 세계에 접속해 있을 뿐이다.
철학자 루소는 젊었을 때 자신의 후견인이자 연인이었던 바랑 부인과 우유를 탄 커피로 아침식사를 하곤 했는데 “이때가 하루 중 우리가 가장 평온하고 편안하게 잡담을 나누는 시간이었다”고 회상했다.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마시면서 바쁠 것도 없이 사랑하는 여인의 눈을 마주 보면서 마시는 부드러운 카페오레 한잔, 생각만 해도 참으로 편안하고 따뜻한 풍경이 아닌가. 루소의 아침식사 시간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편안한 대화가 그리워지는 주말이다. 오늘 저녁은 그런 친구와 함께 보내고 싶다. 6월의 저녁 바람과 커피 한잔을 함께 나누면서.
정지은 사회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