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규 연구원 ‘별간역 연구’서 밝혀
1997년 경복궁 경회루 연못에서 찾은 청동용. ‘경복궁영건일기’에 따르면 이 용은 무인 직함인 오위장을 제수 받은 김재수란 인물이 제작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김민규 간송미술관 연구원은 최근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술지 ‘문화재’에 게재한 ‘경복궁 인수(鱗獸·물고기나 용, 해치처럼 비늘이 있는 짐승)형 서수상(瑞獸像·상서로운 동물상)의 제작시기와 별간역(別看役) 연구’에서 이 같은 내용을 밝혔다.
제목의 별간역은 나라가 큰 사업을 벌일 때 이를 현장 감독하는 임시직함이다. 숙종 이후 궁궐을 짓거나 왕릉을 조성할 때 특별히 내리는 직함이었다. 공사일지인 ‘경복궁영건일기’에도 10여 명의 인물을 별간역으로 선발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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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 문인 집안 출신조차 이런 일을 맡길 땐 별간역을 제수했다. 표암 강세황(1713∼1791)의 증손인 강윤(姜潤)도 경복궁 중건에 별간역으로 참여한 무관직 종4품 군수 직이었다. 김 연구원은 “사농공상과 문무의 차별의식이 강했던 시대였기 때문에 굳이 이런 구분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경복궁영건일기에 근거해 궁 조각상을 살펴보면 또 하나 재밌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정궁을 복원하면서 장식물을 모두 새로 제작하진 않았다. 예를 들어 흥례문과 근정전 사이에 놓인 영제교(永濟橋)의 서수상은 윤곽이 평평하고 이목구비 구성이 조화로운 조선 전기 석조물의 특징을 고스란히 지녔다. 굳이 통일성을 고려해 새로 만들지 않고, 쓸 만한 옛 석물은 ‘재활용’했던 것이다.
이는 조선 후기 왕릉 조성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발견된다. 현종(1641∼1674)과 명성왕후(1642∼1683)의 숭릉은 능침 주위 석물을 효종(1619∼1659)의 옛 영릉 터에 묻혀 있던 석물을 꺼내 사용했다. 장릉과 인릉, 예릉도 마찬가지다. 김 연구원은 “백성들이 곤궁하고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음을 감안해 왕실도 최대한 낭비를 막으려고 노력했음을 엿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