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정재영은 “어떤 아빠냐고? 아들들과 요즘 TV 주도권 전쟁을 벌이는 개구쟁이 아빠다”고 말했다. 방지영 기자 doruro@donga.com
배우 정재영(44)은 언제나 유쾌한 배우다. 그는 촬영현장과 시사회 등에서 늘 분위기 메이커다. 인터뷰 때면 작품 설명보다 취재진을 웃기기에 바쁘다. 그런 그가 이번 만큼은 한없이 진지해졌다. 눈빛과 말투가 달라졌다. 낯선 모습에 쉽게 말을 붙이기가 힘들었다. 그는 왜 이렇게 진지해졌을까.
“원래 진지한 걸 못 견디는데 ‘방황하는 칼날’은 좀 달랐어요. 딸을 죽인 가해자를 죽인 아버지 역할이잖아요. 극단적인 상황에 놓이다 보니 남을 웃길 여력도, 제가 웃을 여유도 없더군요.”
‘방황하는 칼날’에서 정재영이 연기한 상현은 성폭행과 동시에 죽임을 당한 딸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함을 느낀다. 하지만 한 소식통으로 범인을 찾아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르고 딸을 죽인 또 다른 가해자들을 찾기에 나선다. 건물에서 뛰어내리고 영하 날씨의 허허벌판 설원에서 지내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정재영은 촬영 중 낯선 느낌을 겪기도 했다. 그것도 여러 번. 대본을 읽고 연습하며 생각했던 감정이 촬영장에서 나오지 않아 당혹스러운 기분마저 들었다.
“딸의 사망소식을 듣고 주검을 봤을 때 전혀 슬프지 않았어요. 망연자실한 느낌이었죠. 딸의 죽음 자체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 같아요. 사실 예상치 못한 감정이라 스스로도 놀랐어요. 배우 생활을 하며 드문 경험이었죠.”
이어 설원에서 한참을 울었던 경험도 털어놨다.
“자작나무 숲에서 딸의 환영이 ‘아빠, 이제 그만해’라며 위로하는 장면을 찍을 때 복받치더라고요. 모든 아버지들이 자녀들에게 갖고 있는 미안함을 느꼈어요. 사랑한 만큼 표현하지 않은 마음이 끝에 눈물로 터져 버린 거죠. 끝나고도 눈밭에서 한참 울었어요.”
배우 정재영. 방지영 기자 doruro@donga.com
정재영은 관객들이 이 무겁고 어려운 영화를 회피하거나 쉽게 분노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견디기 힘든 영화도 분명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쉽게 화내고 끝내기보다 이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더 좋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났으며, 누구의 책임이고 또 우리는 어떤 위치에 서 있는 사람들인지 생각해보자는 영화예요. 형사 억관(이성민)이 그걸 잘 설명해주고 있는 것 같아요. 피해자와 피의자 사이에서 관객들에게 메시지를 던지는 사람이죠. 다양한 입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도 좋은 관전 포인트가 될 것 같네요.”
“스태프들이나 후배들에게 미안하죠. 어느덧 선배의 위치에 와 있는데 나 때문에 안 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흥행스코어는 정말 하늘의 뜻인 거 같아요. 야구선수 류현진도 계속 잘 하다가 갑자기 죽 쑤잖아요. 그런 거 보면 무슨 기운이 있나봐요.(웃음)”
하지만 정재영은 긍정의 기운을 잃지 않았다. 그는 “배우는 롤러코스터처럼 오르락내리락 하는 인생이다”며 “마음을 다잡고 반성하고 새롭게 시작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동아닷컴 조유경 기자 polaris27@donga.com
사진|방지영 기자 dorur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