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치영 경제부 차장
현 부총리는 이런 상황을 한국수출입은행장 인사를 통해 풀어보려 했다. 지금 수출입은행장 자리는 김용환 전 행장이 6일 퇴임한 이후 20일째 비어 있다. 수출입은행은 기재부 산하 기관이다. 기재부 장관이 제청하고 대통령이 임명하는 수출입은행장은 기재부 차관급 인사가 가는 자리다.
추경호 기재부 1차관이나 이석준 2차관이 가면 서기관 이상 4, 5명이 연쇄 승진을 할 수 있다. 현 부총리가 청와대와 사전 협의에 나서 거의 결론을 냈다는 얘기가 들렸다. 후임 차관에 대한 하마평까지 돌았다.
요즘 현 부총리는 “진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 만도 하다. 별 생각 없이 던진 한마디 때문에 “말의 무거움을 느낀다”는 똑같은 사과를 다섯 차례나 해야 했다. 국회는 여야 가리지 않고 사퇴하라고 난리다. 대통령에게 공공기관 낙하산 인사를 방지하는 대책을 만들겠다고 보고했더니 낙하산 인사를 발표하는 공기업들이 줄을 잇는다. 25일 경제혁신 3개년 계획은 대통령 담화문으로만 발표됐다. 원래 대통령 담화문 발표가 끝난 뒤 현 부총리가 경제부처 장관들이 배석한 가운데 기자 브리핑을 통해 상세하게 설명하기로 돼 있었다. 그런데 24일 밤 갑자기 현 부총리 브리핑이 취소됐다. 대통령이 부총리를 믿지 못하는 징후로 해석됐다. 1997년 외환위기 때부터 경제부처를 취재한 기자의 기억에 이렇게까지 흔들리는 부총리는 없었다.
현 부총리의 딱한 처지는 그의 개인사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다. 경제부총리는 정부 경제팀을 지휘하고 경제정책을 조율하는 자리다. 경제부총리가 흔들리면 정책이 흔들리고 국가경제의 미래가 흔들린다. 그가 지금의 처지에서 벗어나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지금 상황에 현 부총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무엇인지 전현직 관료들에게 물어봤다. 종합해보면 소신껏 정책을 만들고 목소리를 높이라는 주문이 많았다. 대통령의 입만 쳐다보고 대통령이 만들어놓은 틀 안에 스스로를 가두지 말라는 것이다. 한국경제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정책이라는 확신이 서면 대통령과 청와대를 이해시키고 야당 의원들을 찾아가 논리싸움을 하고 국민을 설득해야 한다.
현 부총리의 딱한 처지를 보며 한 전직 경제부처 관료는 ‘검투사의 결기’를 떠올렸다고 한다. 경제부총리는 로마시대 검투사의 심정으로 일해야 한다는 것이다.
현 부총리는 자리를 걸고 일해야 한다. 그러면 그의 처지도 그에 대한 국민의 평가도 달라질 것이다. 개인적인 명예 회복을 위해서가 아니다. 한국경제의 미래를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게 옳다.
신치영 경제부 차장 higgle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