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연소 대목수 김승직이 말하는 ‘선취업 후진학’
김승직 한옥시공사 한채당 대표는 ‘선취업 후진학’으로 진로를 개척했다. 김 대표는 “현장에서 일을 하니 어떤 학문을 배워야 할지 명확히 보였다”고 말했다.
낮엔 공사현장에서 한옥을 짓는 데 필요한 목재를 날랐다. 서까래, 기와, 창호 등 한옥 구조물을 각각 총괄하는 전문기능인들의 재주를 어깨너머로 보고 배웠다. 공사일이 끝나면 작업실로 돌아와 낮에 본 기술을 떠올리며 연습했다. 그렇게 5개월을 살았다.
“어느 날 제 손가락을 보았는데 손톱이 온통 멍투성이더라고요. 그대로 방치해서 멍이 심해지면 손가락을 움직일 수 없어요. 방법은 둘 중 하나예요. 멍이 자연스럽게 빠질 때까지 3∼4개월을 기다리거나 멍든 손톱을 빼내야죠. 연습을 계속하기 위해 스스로 손톱을 뺄 수밖에 없었어요. 손톱 10개 중 8개를 뺐어요.”
현장에서 현장으로
김 대표는 고3 진학을 앞둔 겨울방학에 진로를 결정했다. 직업반 공고를 보고 마음이 움직였다. 건축 공사현장에서 관리직 업무를 하던 아버지도 “목공일을 배워보지 않겠냐”고 권유했다.
직업반에 들어가 충북 음성의 전문건설공제조합에서 진행한 교육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전국 고교생을 대상으로 전문 기능자들이 기술을 가르치는 프로그램이었다. “당시 목수는 천대받는 직업이란 인식이 강했어요. 주위에선 젊은애가 이 일을 해도 괜찮겠냐고 우려하는 시선이 많았죠. 하지만 건축 공사현장에서 관리직 업무를 하던 아버지가 ‘앞으론 기능의 시대가 올 것이다. 기능을 배운 사람은 70대까지도 일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이왕 하는 일이라면 ‘최고가 되겠다’고 생각했어요. 인생을 걸어보기로 했죠.”(김 대표)
집을 떠나 충북 음성에서 목공을 배우기 시작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주 5일은 공제조합에서 기술을 배웠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 정도 공사현장에서 일하다 입대를 했다. 건축목공기능사, 목재창호기능사, 거푸집기능사 등 현장 기능사 자격증이 있어 목공병이 됐다.
군 생활은 또 다른 현장이었다. 아프가니스탄에 파병돼 6개월을 지냈다. 활주로 공사현장에서 일했다. 김 대표는 “고등학교 때부터 현장에서 계속 배웠다. 고3 때 국내 대표 기능자분들께 목공일을 기본부터 제대로 배웠다”면서 “군 시절엔 미군부대와 인접해 지냈는데 현장 총책임자가 공사를 주도하는 한국방식과 달리 개개인이 맡은 분야 일을 하는 ‘책임제 방식’을 배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기능은 거짓말 못해요”
김 대표는 2007년 대학을 잠시 휴학하고 2008년 ‘문화재보수기능자 국가자격시험’ 대목수 분야에 응시했다. 대목수는 궁궐이나 사찰, 전통가옥 등 대규모 목공일을 하는 사람으로 한옥을 짓는 전 과정을 총괄한다. 김 대표는 그해 시험에 최종 합격했다. 복학해 대학을 졸업한 그는 조경학을 전공한 문화재보수기능자 대목수가 됐다. 조경 혹은 한옥 관련 회사들의 눈길을 끌만한 타이틀이었다.
김 대표는 26세에 입사 3개월 만에 425억 원 규모의 서서울 호수공원 프로젝트 중 핵심 프로젝트를 총괄했다.
“제가 대학에 진학하는 진로경로를 밟았으면 건축학과 4년, 석사 2년, 박사 2년을 마치고 30대가 되어서야 현장 소장이 됐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현장에 먼저 나가면서 빠르게 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를 수 있었어요.”(김 대표)
김 씨는 2010년 3월 독립해 그 해 10월 개인사업을 시작했다. ‘하심(下心)’이란 자신의 호를 회사 이름으로 내걸었다. 최연소 문화재보수기능자 대목수가 되었을 때 지인이 손수 지어준 호다. ‘교만해지지 말고 세상 앞에 겸손하라’는 의미였다. 회사를 경영하기 위해 중소기업진흥공단의 ‘청년창업사관학교’에 등록해 200시간의 교육도 받았다. 그리고 2013년 8월 한옥을 바탕으로 한국의 의식주를 브랜드화하는 사업을 펼치는 ‘한채당’을 설립했다.
이태윤 기자 wolf@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