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양희(1942∼)
갈대의 등을 밀며 바람이 분다 개개비 몇 발끝 들고 염낭게 갯벌 물고 뒤척거린다 날마다 제 가슴 위에 거룻배 한 척 올려놓는 갈대밭 산다는 건 갈대처럼 천만번 흔들리는 일이었으나 실패한 삶도 때론 무엇인가 남긴다 남긴다고 다 남는 것일까 순천(順天)은 벌써 나를 알아버린 듯 마음의 물결까지 출렁거린다 섬은 발목 잡혀 꿈쩍 않는데 물거품이 해안까지 따라온다 언제 꽃을 바람처럼 피운 갈대들 그들이 환하다 문득 느낀다 내 어둠이 나에게서 떨어지지 않는다 언제나 낮게 엎드린 포구 수평선 바라보다 나는 겨우 세상은 공평한가 묻고 말았다 방파제 너머 파도가 밀려간다 밀려간 것은 물결만이 아니다 날마다 내 속으로 밀려온 갈대들 오늘은 대대포에 들고 말았네
순천만은 갈대숲의 장관을 볼 수 있는 세계 최대 연안습지로, 대대포는 거기 자리한 포구다. 끝없이 펼쳐지는 갈대밭이 바람에 아득히 흔들리고, 그 바람결에 ‘개개비 몇 발을 든다’. 갈대밭에 부려진 거룻배 한 척도 기우뚱거리리. 그 풍경 속에서 화자는 ‘산다는 건 갈대처럼/천만번 흔들리는 일이었다’고, ‘실패한 삶도 때론 무엇인가 남긴다고’ 생각하다가 돌연 고개를 젓는다. ‘남긴다고 다 남는 것일까!’ 투항(投降)에서 저항(抵抗)으로의 간극이 물결처럼 미세하게 맞물린다. ‘순천은 벌써/나를 알아버린 듯 마음의 물결까지 출렁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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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