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서 王과 神에 비견되던 위상… 기독교 전파 1000년 걸쳐 서서히 몰락◇곰, 몰락한 왕의 역사/미셸 파스트로 지음·주나미 옮김/400쪽·2만3000원·오롯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에 곰은 이승과 저승을 잇는 중간자이자 인간세계와 동물세계 사이에 위치한 특별한 존재로 숭배됐다. 스위스 베른역사박물관이 소장한 이 청동상(2세기 말)은 켈트 신화 속 풍요의 여신 아르티오(오른쪽 과일 바구니 옆 의자에 앉은 여인)에게 바쳐진 조각이다. 곰과 풍요의 여신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아르티오는 그리스 신화 속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에 대응하는데 그 수호 동물이 바로 숲의 제왕 곰이었다. 오롯 제공
이 이론엔 약점이 있다. 곰 토템을 고대국가의 건국신화로 간직하고 있는 한반도가 빠져 있다는 점이다. 바로 마늘과 쑥을 먹고 인간으로 변신한 웅녀 이야기가 등장하는 단군신화다. 환태평양 일대 곰 설화의 특징은 곰과 인간이 서로 교차 변신한다는 점이다. 또 곰과 인간 사이의 후손이 위대한 영웅이 되는 경우가 많다. 웅녀설화는 이에 딱 부합한다.
‘곰에서 왕으로’와 단군신화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을 채워 줄 책이 번역됐다. 제1회 중세 프로뱅상 수상작인 ‘곰, 몰락한 왕의 역사’다. 중세 유럽의 문장, 인장, 상징 연구가인 미셸 파스트로가 2007년 발표한 책이다.
광고 로드중
이런 증거에도 불구하고 유럽 고대사학계가 여전히 선사시대 곰 숭배를 단정할 수 없다며 논쟁 중이란다. 저자는 곰 숭배의 흔적은 중세에도 역력하다고 강조한다. 특히 일찍부터 기독교화한 지중해 국가를 제외하고 게르만, 슬라브, 켈트, 스칸디나비아의 종족에게 곰은 힘과 용기, 경배의 대상이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켈트족의 영웅 아서왕이 ‘곰왕’이었다는 분석이다. 오늘날 인도유럽어에서 곰은 art-, arc-, ars-, ors-, urs-로 시작하는 어근과 관련된다. 사냥의 여신 아르테미스(Artemis)의 수호동물이 곰이고,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르카디아(Arcadia)는 ‘곰의 나라’다. 이름에 곰의 흔적이 남은 아서(Arthur)가 마법의 검을 뽑는 시점은 곰이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2월 초이고 아서가 죽는 날은 곰이 겨울잠에 드는 11월 초다. 결정적으로 아서가 죽음을 맞을 때 충신 루칸을 너무 세게 끌어안는 바람에 루칸의 심장이 으스러져 죽었다는 이야기도 아서가 ‘곰=왕’이었음을 보여 준다. 이는 단군 왕검의 왕검이 ‘왕=곰’을 의미한다는 해석과 맥이 닿는다.
덴마크 왕실의 선조가 곰이었으니 햄릿도 곰의 후손이 되는 셈이다. 고대 영웅시가의 주인공 베어울프는 곰과 인간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영웅으로 그 이름은 곰을 에둘러 호칭한 ‘벌들을 약탈하는 자’나 ‘벌의 적’이란 의미다. 오늘날 알파벳 b나 m으로 시작하는 곰을 지칭하는 유럽언어는 곰의 갈색 털빛이나 곰이 좋아하는 꿀과 관련한 호칭과 관련 있다. 왕의 이름을 피했던 동아시아의 기휘(忌諱)문화와 닮은꼴이다.
왕과 신에 비견되던 곰의 위상은 유럽 전역에 기독교 전파가 이뤄지는 5∼13세기에 걸쳐 서서히 몰락했다. 곰 숭배 문화를 척결해야 할 이교도 문화로 간주한 기독교의 집요한 공략의 결과였다. 공략은 세 갈래로 이뤄졌다.
광고 로드중
거의 1000년에 걸쳐 진행된 이런 공략은 곰의 자리에 사자를 앉히는 것으로 완성됐다. 성경에는 곰과 사자의 좋은 면과 나쁜 면이 동등하게 나온다. 하지만 곰에 대해 나쁜 점만 부각시키고 사자의 나쁜 점은 레오파르두스라는 허구의 동물에게 뒤집어씌웠다. 그 결과 13세기경 유럽 왕실과 귀족 문장(紋章)에서 사자는 15%, 곰은 0.5%를 차지하게 된다. 이후 곰은 서커스의 구경거리를 거쳐 우둔함과 멍청함의 대명사로 처절히 몰락한다.
하지만 너무 슬퍼하지 말라. 20세기 들어 ‘곰의 역습’이 다시 펼쳐지니, 1902∼1903년 미국과 독일에서 동시에 탄생한 곰 인형으로 어린이들의 집단무의식 속에서 부활하고 있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