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관에 비한다면 거리가 우리에게 더 좋았던 셈이었다. 벽으로 나누어진 방들, 그것이 우리가 들어가야 할 곳이었다. ―서울, 1964년 겨울(김승옥·하서·2009년) 》
한국 멜로영화의 고전 ‘맨발의 청춘’은 1964년 청춘들의 심금을 울렸다. 권투 잡지로 시간을 죽이는 건달 두수(신성일)와 이층 양옥집에 사는 외교관 딸 요안나(엄앵란)의 이룰 수 없는 사랑 얘기였다. 이후 뒷골목 인생과 여대생의 계층 차를 뛰어넘은 러브스토리는 1960년대 내내 다양하게 변주됐다. 하류층 실업 남성들의 판타지에 조응한 것이었다.
그 시절 실업률은 30%에 육박했다. 한국의 단골 휴양지가 된 태국이나 필리핀보다 못살았다. 젊은이들은 도시로 모여들었지만 도시라고 일자리를 주진 못했다. 1963년 최초로 파독 광원 500명 모집에 전국에서 4만6000명이 응모했다. 이 중 상당수는 대졸 이상의 학력이었다. 희망과 불안이 공기처럼 떠돌던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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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2013년 겨울, “안녕들 하십니까?” 손글씨 대자보 열풍이 거세다. 한 고려대생이 “남의 일이라 외면해도 문제없으신가”라며 사회문제에 눈감는 청년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적은 대자보를 붙인 게 시작이었다. 대학가에, 여의도에, SNS에 릴레이로 “안녕들”이 내걸리고 있다.
‘수출 8대 강국’이란 화려한 이름 아래 구직을 포기한 ‘니트(Not in Education, Employment or Training)족’이 100만 명을 넘어선 현실과 무관할까.
홍수영 기자 gae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