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관1주년 역사박물관 국제학술대회
1992년 미국의 전국역사교육연구소(NCHS)가 만든 ‘역사표준서’는 당시 교육계를 넘어 정치·사회적 분란을 촉발했다. 표준서는 정부 차원에서 역사교육의 방향을 제시하려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이었는데, 너무 편향됐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일례로 매카시즘과 쿠클럭스클랜(KKK)은 17∼19차례 거론해 비판하면서도 토머스 에디슨이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조지 워싱턴이 초대 대통령이란 설명도 뺐다. 많은 정치가와 학자들은 “소수자 시각에 치중한 나머지 자유민주주의라는 건국 가치를 소홀히 했다”며 비난했다.
개관 1주년을 앞두고 13일 대한민국역사박물관(관장 김왕식)이 개최하는 국제학술대회 ‘세계 각국의 역사논쟁-갈등과 조정’은 여러모로 많은 시사점을 던진다. 박물관은 “올해는 다큐멘터리 ‘백년전쟁’ 논란과 교과서 파동으로 유독 역사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며 “해외 역사논쟁 과정을 통해 공론을 모으고 해결하는 과정을 배우려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정경희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이 발표하는 ‘미국 역사표준서 개발을 둘러싼 쟁점과 그 함의’는 논란을 해결하는 미국 상원의 역할을 조명했다. 18개월가량 지속된 공방은 상원이 수정 결의안을 채택하며 NCHS의 표준서 수정을 이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상원은 정파나 이해관계에 휩쓸리지 않았다. 공화당 52석, 민주당 48석이었지만 수정안은 99 대 1이란 압도적 표차로 통과했다. 교육은 당리당략의 대상이 아니라는 대전제 아래 지속적인 대화로 합의를 이끌어낸 것이다. 정 위원은 “한국 현대사 논쟁은 엘리트주의와 결합돼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변질되며 각자의 입장을 사회 전체에 강요하려는 시도로 전락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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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장의 소요를 우려해 논쟁을 비켜 가려는 태도도 바람직하지 않다. 황보영조 경북대 교수는 ‘스페인의 과거사 논쟁’을 통해 스페인 내전과 프랑코 정권 시절 희생자 관련 역사논란을 예로 들었다. 1970, 80년대 스페인은 평화 유지를 목적으로 ‘침묵협정’을 맺어 관련 과거사를 거론하지 않았다. 이는 국가가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데 도움을 줬지만 본질적 문제는 잠복된 상태였다. 결국 1990년대부터 기억회복운동이 벌어졌고 지금까지 혼란을 겪고 있다. 정치권은 좌우로 갈려 소모적 공방만 일삼았고, 국민은 여전히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