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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규선 칼럼]조선총련과 통진당

입력 | 2013-11-25 03:00:00

1955년 창설 이래 북한을 짝사랑해온 조선총련
평판-조직-자금 모두 잃고 지금은 고립무원의 신세
벼랑 끝에 선 통진당은 아낌없이 北에 준 나무… 총련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심규선 논설위원실장

한 그루의 나무가 있다. 늦가을, 이 나무도 앙상하다. 누군가에게 아낌없이 주면서 살아온 때문이다. 아니, ‘아낌없이’라는 말만으로는 실례다. 자기 살까지 베어 먹이며 눈물겹게 섬겨 왔다는 헌사가 어울린다. 그러나 이 나무는 내년 봄에 다시 잎을 피우리라는 기약이 없다. 고사(枯死) 직전인데도 문득 주위를 둘러보니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북한을 너무 사랑해서 슬픈 이 나무의 이름은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조선총련이다.

지난달 말 워싱턴포스트는 ‘북한은 중요한 소득원, 조선총련을 잃었다’고 보도했다. 제목만 보면 총련이 북한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고 오해할 수도 있다. 실상은 역설적이다. 북한이 더는 돈을 우려내지 못할 정도로 총련이 망가졌기에 ‘잃었다’는 것이다.

총련은 끝이 안 보이는 겨울의 문턱에 서 있다. 총련을 돕는 것이 조국 사랑이라며 순정과 재산을 바쳐 온 동포사회가 등을 돌린 지 오래다. 한때 50만 명이나 되던 지지자는 4만 명으로 쪼그라들었다. 총련의 눈치를 보던 일본 사회도 예전 같지 않다. 총련본부 건물을 경매하고, 부실 조선은행을 폐쇄하고, 조선학교의 지원을 끊는다. 제 코가 석 자인 북한이 손을 내밀 리도 없다. 마른 수건이나 더 쥐어짜지 않으면 다행이다.

총련을 보고 있으면 겹쳐 보이는 조직이 있다. 통합진보당이다. 인정하든 안 하든 통진당도 북한 때문에 헌법재판소 앞에 서 있다.

총련은 1955년 5월, 전후 일본에 남게 된 조선인의 권리 옹호 단체로 출범했다. 그런데 얼마 안 가 철저하게 북한 추종 노선으로 돌아섰다. ‘지상 낙원’이라고 속여 9만3000여 명이나 북송하고도 여태 입을 다물고 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개인금고’로 전락해 그들에게 보낸 검은 현찰은 집계조차 힘들 정도다. 창립 이후 총련은 북한을 비판한 적이 없다. 2002년 김정일이 일본인 납치를 인정했을 때 ‘유감’이라고 한 것이 유일한 예외다. 북한을 철석같이 믿었던 많은 총련 사람이 이때 충격을 받고 총련을 등졌다. 통진당의 노선은 어떤가.

총련은 일본에서 천황(일왕), 야쿠자와 함께 ‘3대 금기어’ 중 하나다. 일본사회의 미안함도 작용했지만 조직이나 활동이 베일에 싸여 있는 것도 한 이유다. 총련의 조직도는 허울뿐이고, 실세는 주체사상으로 무장된 극소수의 ‘학습조’다. 이들은 조직 보위를 위해 무술 유단자로 ‘올빼미부대’를 만들고 ‘비공연(非公然) 조직’으로 대남 공작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숱한 불법과 비리를 저질렀음이 총련에 회의를 품고 이탈한 전직 간부들의 책과 인터뷰를 통해 속속 드러나고 있다. 통진당의 조직은 어떤가.

총련을 해체해 버리고 재일동포만을 위한 새 조직을 만들자는 주장이 나온다. 회의적이다. 총련은 ‘리틀 북한’이다. 지도부에 대한 절대 충성, 비선조직을 이용한 중앙 통제, 사상 검증을 통한 반대파 숙청, 불법 사업을 통한 자금 마련 등으로 조직을 유지해 왔다. 지난해 5월 총련 신임 의장이 된 허종만은 김정일의 심복으로 오래전부터 ‘학습조’의 정점이었다. 조직의 체질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통진당의 미래는 어떤가.

다만 하나, 총련과 통진당의 차이점은 북한과의 직접 연계 여부다. 이는 이석기 재판을 통해 가려질 것이다. 설령 총련처럼 직접적 관계는 없는 것으로 밝혀지더라도 우리 사회의 주류는 통진당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 총련의 속살을 보고 일본 사회가 등을 돌린 것처럼.

북한과 총련의 관계를 조직 대 조직으로 보면 안 된다. 거짓말쟁이에다 돈 좋아하는 바람둥이와 순종적이다 못해 어리석은 여자의 잘못된 만남, 즉 사람의 관계로 봐야 빠르다. 그래야 북한의 넓고 깊은 죄업과 쇠락한 총련의 슬픔이 그나마 드러난다. 마침 전직 총련 간부의 책에서 그런 구절을 발견했다.

“…본국(북한)과 총련은, 말이 험하긴 하지만 추녀(醜女)의 깊은 애정 같은 것으로, 언제까지나 재일(총련) 쪽의 일방적인 짝사랑에 불과한 것이다. 사람들이 그걸 깨닫게 되는 것은 마음도 몸도 다 바친 끝에, 몽땅 빨려 버리고 너덜너덜해져서 버림받은 후다.”(한광희의 책, 158쪽)

짝사랑을 한 ‘추녀’가 가엾다, 고만 할 수 있을까. 통진당에 던지는 총련의 질문이다.

※이 칼럼은 ‘조선총련’(김찬정, 2012년 7쇄, 新潮新書), ‘조선총련’(박두진, 2008년, 中公新書), ‘우리 조선총련의 죄와 벌’(한광희, 2005년, 文春文庫)을 참고했습니다.

심규선 논설위원실장 kssh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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