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홍 사회부장
그렇다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어떤 입장일까. 만약 대북심리전단의 댓글이 그의 지시에 의한 것이라면 도대체 그는 왜 도움을 자처했을까.
필자는 몇몇 국정원 직원에게 원세훈 시절 4년에 대해 물어봤다. 공통된 평가는 자의적 인사가 횡행했다는 점이다. 공식 인사라인이나 해당 부서장의 의견보다는 중간간부급에 심어놓은 사람과 핵심 측근들에게 의존해 인사를 했다는 평가다. 부임 초기 모 차장(차관급)이 의견을 개진하자 “인사는 원장 고유 권한이다. 누구도 말하지 말라”고 면박을 줬다고 한다. 순응하지 않는 직원은 정기인사와 무관하게 수시인사로 불이익을 줬다. 비공개 자리에서 불만을 토로한 한 간부는 직급이 강등돼 지방으로 갔다고 한다.
부이사관급 총무팀장이 지방으로 전배되는 등 총무팀 직원들이 대거 교체된 적도 있는데, 당시 원장 가족이 다니던 직원 시설에서 ‘소홀히’ 대한 게 원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이런 증언들이 사실인지는 남재준 원장 부임 후 징계위를 구성해 조사하고 있으므로 곧 판명이 날 것이다. 만약 실제로 그렇게 강압적 분위기였다면 직원들이 부당한 지시를 거부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원 전 원장이 박근혜 후보를 도와야겠다고 결심할 이유가 있었을까. MB 핵심 측근인 데다 친화력이 뛰어난 성격도 아닌 그는 박근혜 캠프의 신뢰를 별로 얻지 못했다. 특히 2009년 세종시 수정안을 놓고 MB-박근혜가 충돌할 때 원 전 원장이 박근혜 개인에 대한 험담을 했고 이게 박근혜 진영에 전해졌다고 한다. 게다가 1월 인수위의 국정원 업무 보고 당일 원 전 원장이 집무실에서 대기하지 않고 개인 스폰서와 골프를 쳤다는 소문이 나면서 인수위는 매우 불쾌해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관계에서 원 전 원장이 박근혜 정권에 어떤 기대를 했을 리는 만무하다. 보험 차원에서 생색내기를 하려고 댓글을 지시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지만 적극 지원할 상황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야당 정치인까지 종북의 카테고리에 넣은 그의 발언이 검찰 주장대로 선거 개입 지시용이었는지, ‘강경우파의 색안경이 빚은 편견의 산물’인지는 앞으로 법원이 가릴 것이다.
댓글이 원장의 지시에 의한 것이든, 개인적 차원이든 국정원 요원들이 중립의무를 저버리는 짓을 저질렀다는 사실은 내부 기강과 사명감이 얼마나 훼손됐는지를 보여준다. 그 책임은 정보기관 업무의 특수성과 엄중함에 걸맞지 않은 인물을 측근이라는 이유만으로 국정원장에 기용한 MB의 잘못이다.
원세훈 국정원의 실패는 국정원사에 백서로 남겨 반면교사로 삼을 만하다. 원세훈이 국정원 개혁이라는 과제를 짊어진 박근혜 정부에 기여한 게 있다면 바로 그런 점 아닐까.
이기홍 사회부장 sechep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