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경희 교수 ‘동관왕묘’ 논문 눈길
서울 종로구 숭인동의 보물 제142호 동관왕묘에 있는 금동제 관우신상. 높이 약 2.5m인 관우상은 조선과 명나라 장인이 왕실의 명을 받아 당대의 기술력을 총동원해 만든 작품이다. 장경희 교수 제공
동관왕묘는 17세기 유례가 드문 ‘한중 합작 예술의 전형’으로 조선과 명나라 왕(황)실의 국토수호 의지를 담은 정부 간 공공협력의 결과물이다. 장경희 한서대 문화재보존학과 교수는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술저널 ‘문화재’ 제46권에 게재한 논문 ‘동관왕묘의 조각상 연구’에서 동관왕묘의 유래와 가치를 자세히 소개했다.
중국인들이 관우를 신격화해 전국에 수많은 관왕묘를 세운 건 널리 알려진 사실. 왕보다 격상시킨 관제(帝)묘가 약 30만 개 산재해 있다. 국내에는 1598년 정유재란 때 조선에 파병된 명나라 장수들이 왜적 퇴치를 기원하며 건립하기 시작했다. 현재 경북 안동 전북 남원 등 10여 곳에 남아있다.
일제의 치졸한 방해에도 동관왕묘의 역사적 가치는 퇴색하지 않았다. 당대 한중 장인들이 힘을 모아 빚어낸 예술성이 잘 구현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대표 조각상인 ‘금동제 관우신상’은 구리 4000여 근(약 2.4t)을 들여 만든 높이 2.5m의 거작이다.
금동제 관우신상은 초기에 명나라 단독으로 구리 3800근으로 만들려다 실패했다. 하지만 조선 동장(銅匠)이 기술력을 보탠 뒤 300근 정도를 더 투입해 주조에 성공했다. 조선에서 제작된 유일한 관우 금동상으로, 명대에 유행한 당송시대 의복 양식을 살필 수 있는 작품이다. 관우상 앞에 배치한 소조상인 관평(關平)과 주창(周倉) 왕보(王甫) 조루(趙累)는 실존했던 인물들로 역시 예술성이 높다.
동관왕묘는 원래 중국 문화이지만 관우상 뒤 일월오봉도나 앞쪽 한 쌍씩의 문무관 배치는 ‘조선식’이다.
관우 뒤편에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해와 달, 다섯 봉우리가 그려진 그림)가 있는 것도 조선 스타일이다. 2011년 ‘동관왕묘 소장유물 기초학술조사’에서 일월오봉도 뒤편에 숨겨져 있었던 것으로 밝혀진 대형 운룡도(雲龍圖) 역시 조선 중기 왕실 미술의 특색이 잘 드러난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