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갈 때 보았네/올라올 때 못 본/그 꽃’
인생에 대한 성찰을 3줄로 압축한 시 ‘그 꽃’부터 우리 역사에 명멸했던 인물들을 다룬 30권짜리 ‘만인보’까지, 빛 고운 서정시부터 날선 현실 비판을 담은 저항시까지. 고은 시인의 시 세계는 깊고 넓다. 소설과 평론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든 것은 물론이고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로 시작하는 ‘가을 편지’, 가수 양희은이 부른 ‘세노야’ 등 7080세대와 친숙한 노랫말도 썼다.
영향을 준 작가들이 있느냐고 묻자 이렇게 답했다. “나는 영향을 거부한다. 우리 모두는 바람 물 달빛 이슬의 영향을 받는다. 그런 것의 일부처럼 받은 영향이라면 인정하지만, 내 조상은 나다!”
인터뷰 시작 전에 부인 이 씨가 차와 과일을 내왔다. “두 분이 함께 기념사진을 찍자”는 말을 건넸더니 손사래를 치고 황급히 모습을 감추었다. 대화 도중에 어쩌다 부인 얘기가 나오면 시인의 표정이 알전구를 켠 듯 환해졌다. “아내의 말, 미치도록 잘 듣는다. 아내 없이는 문학세계도, 내 존재도 불가능하다. 그렇게 술을 먹고도 살아 있는 것은 아내 덕분이다. 옛날처럼 살았다면 벌써 땅속에 있을 것이다. 결혼 이후 내 문학도 질과 양 측면에서 달라졌다.”
그는 아내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땅속에 박힌 바위와 같다”고 비유했다. 시인의 열렬한 사랑은 2년 전 나온 ‘상화 시집-행성의 사랑’에도 실려 있다. 한 편 한 편 읽다 보면 이 부부가 함께 보낸 30년의 세월이야말로 놀라운 예술적 경지임을 알게 된다. 시인과 헤어질 때 문득 노자가 한 말이 생각났다. ‘누군가를 깊이 사랑하면 힘이 생긴다. 그리고 깊이 사랑받으면 용기가 생긴다.’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