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현 소비자경제부 차장
경제학 교과서에 자주 등장하는 라틴어 문구 ‘세테리스 파리부스(Ceteris paribus)’는 ‘다른 조건이 변하지 않는다면’이라는 가정이다. 경제학자들이 수요의 법칙 등을 설명할 때 자주 쓴다. 수요와 가격의 인과관계 등을 설명하기 위해 제품의 품질 등 다른 변수들은 모두 같은 것으로 가정할 때 쓰는 이론적 장치다.
제대로 경제학을 공부한 사람들은 세테리스 파리부스가 현실엔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안다. 세상에는 그 밖의 수많은 변수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경제 공부를 잘못 했거나, 이런 사실을 알고도 모르는 척 눈을 꼭 감고 국가 경제의 향방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숫자를 계산해 내는 정치인과 정치에 눈이 팔린 경제학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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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목표를 현실화하기 위해 국세청은 요즘 고삐를 바짝 죄고 있다. 단골 표적은 유흥주점 주인, 의사들, 주유소 사장 등이다. 한 해에 1억5000만 원씩 세금을 떼어먹는 자영업자 1만 명이 있다면 이들에게 1조5000억 원의 세금을 더 거둬 복지에 쓸 수 있다는 식의 계산이 깔려있다.
부당하게 챙긴 소득에 세금을 법대로 걷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다만 이 계산에는 큰 함정이 있다. 이들이 지금까지 탈세(脫稅)를 전제로 영업을 해왔다는 점이다. 1억5000만 원 세금을 떼먹는 덕에 1억 원을 집에 가져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이다.
법대로 1억5000만 원씩 세금을 거두면 이들은 매년 5000만 원 손해를 본다. 그러느니 차라리 문을 닫는다. 최근 술집 주인들이 모여 세금 부과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이다 분신까지 한 일, 몇 달 만에 동네 단골병원에 갔다가 문이 닫혀 당황스러웠던 경험, 주유소들이 줄줄이 경매에 넘어가는 것 모두 이런 일과 관련이 있다.
폐업한 술집이나 병원은 세금을 안 낸다. 정치인들의 산수는 결과적으로 틀린 답이 되고 기대했던 복지재원에는 구멍이 생긴다. 지하경제 양성화뿐 아니라 세출 구조조정, 비과세·감면 축소에도 비슷한 계산법이 적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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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세테리스 파리부스’ 대신 ‘모든 게 바라는 대로 되면’이란 가정을 바탕으로 황당한 숫자들을 만들어 냈다. 최근 여권의 고위 관계자들마저 이렇게 만들어진 숫자들의 허상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5년 내내 국민들이 이 숫자들에 시달리지 않도록 지금이라도 현실을 고려해 엉터리 산수를 바로잡아야 한다.
박중현 소비자경제부 차장 sanju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