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논설위원
박 대통령은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이런 기사가 왜 나갔느냐며 추궁하듯 물었다. 이 수석은 “아직 기사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며 머쓱해했다. 박 대통령은 “제가 기사를 보고 먼저 연락드려야 하느냐”고 타박했다. 온몸이 얼어붙는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쓰라고 만든 말일 게다. 홍보수석실 내 언론보도 모니터링팀이 대폭 보강된 것은 이때부터다.
같은 달 22일 오후 김행 청와대 대변인은 청와대 비서동에서 기자실로 향하고 있었다. 이날 오전 김병관 국방부 장관 후보자가 전격 사퇴하자 박 대통령은 김관진 장관의 유임을 결정했다. 김 대변인은 마음이 급했다. 청와대의 반응을 기다리는 기자들의 성화도 대단했지만 공식 발표 전에 인사 정보가 새면 ‘촉새 색출령’이 떨어질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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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도일까 싶겠지만 박 대통령은 정말 무섭도록 부지런하고 철저하다. 이를 단점이라고 몰아세울 이유는 없다. 좀 더 유연한 리더십을 보여주면 금상첨화겠지만 어차피 지난 대선에서 국민은 ‘소통과 타협의 달인’을 대통령으로 뽑은 게 아니다. 그의 집념과 원칙, 국가에 대한 헌신에 표를 줬다. 그렇기에 상당수 국민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는 박 대통령에게 여전히 기대를 갖고 있다. 청와대 대변인이 성추행 의혹을 받고, 법무부 차관이 성접대 동영상 논란에 휘말리고, 검찰총장에게 숨겨둔 아들이 있다는 ‘섹스 스캔들 3종 세트’에도 견고한 그의 지지율을 보라.
웬만한 외부 요인에 흔들리지 않는 박 대통령에게 야당은 정치 공세만을 퍼붓는 ‘과거 세력’일지 모른다. 박 대통령은 지난달 “세상에는 신도 바꿀 수 없는 일이 있다. 그것은 과거를 바꾸는 것이다”고 말했다. 1년째 과거사에 얽매인 정치권이 경제 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이라는 미래를 가로막고 있다는 박 대통령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어쩌랴. 과거의 일은 현재를 송두리째 잡아먹는 괴물로 변했다. 국가정보원에 이어 군(軍)까지 대선에 개입하려 했다는 의혹은 분명 과거 일이다. 하지만 이 일로 검찰은 풍비박산이 났고 주요 국가기관의 신뢰도는 땅에 떨어졌다. 이런 분란과 불신은 박 대통령의 국정 성과를 야금야금 갉아먹을 것이다.
지금 박 대통령의 무서운 집념이 가장 필요한 분야는 과거와의 단절이다. 검찰과 군의 자체 수사나 국정원의 ‘셀프 개혁’은 또 다른 분란거리만 제공할 뿐이다. 이들 기관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면 더 철저히 시시비비를 가려 불신의 싹을 잘라야 한다. 그런 뒤에야 박 대통령에게 현재와 미래가 열린다. 영국 시인 바이런은 “가장 뛰어난 예언자는 과거”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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