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남 영암군 공동주택 ‘달 뜨는 집’ 찾아가보니
집 없는 설움을 겪다가 월출산 자락에 보금자리를 얻고 한 가족이 된 ‘달뜨는집’ 2호 식구들이 13일 베란다에 모여 활짝 웃고 있다. 영암=박영철 기자 skyblue@donga.com
이들은 얼굴 한번 마주한 적이 없고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저마다 딱한 사연을 안고 이곳에 와 한 가족이 됐다. 기초생활수급자인 김쌍례 할머니(73)는 이곳에 오기 전 사글세 집을 전전했다. 장애수당과 기초노령연금 등으로 어렵게 생활하다 달뜨는집으로 옮기며 난생 처음 자신의 이름을 문 앞에 내건 보금자리를 얻었다. 다리가 불편해 전동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그는 “의지할 사람이 있고 자원봉사자도 자주 찾아주니 외롭지 않다”고 말했다.
입주자 가운데 최고령인 이복동 할머니(83)는 “팔순 넘어 이런 호강이 없다. 살기 좋고 마음 편하니 하루하루가 즐겁다”고 했다. 그는 마을 이장 집 창고를 개조한 방에서 생활하다 4년 전 이곳에 거처를 마련했다. 한글을 깨우쳐 주는 ‘문해(文解)학교’에 다니던 할머니는 스승의 날 행사 때 김일태 영암군수를 만나 딱한 사정을 털어놓으면서 달뜨는집에 입주했다. 그는 혼자 집앞 텃밭을 가꿀 정도로 건강해 거동이 불편한 옆방 할머니를 살뜰히 챙긴다. 관절염으로 고생하는 곽윤숙 할머니(82)는 “오늘도 언니(이복동 할머니)가 아욱으로 죽을 쒀 가져왔다”며 “서로가 없는 살림이지만 콩 한쪽도 나눠 먹을 정도로 정이 깊다”고 자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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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한 씨(23)는 3년 전 한 식구가 됐다. 어릴 적 집을 나간 어머니와 소식이 끊긴 데다 5년 전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세 살 아래인 여동생 손을 잡고 이곳에 왔다. 그는 지난해 검정고시에 합격해 고졸 자격증을 딴 뒤 대학수학능력시험을 준비 중이다.
다문화가정인 신성현(46)·황은경 씨(36) 부부는 두 달 전 이사를 왔다. 8년 전 필리핀에서 시집을 온 황 씨는 영암군 도포면에서 살다가 남편이 노동일을 하다 다쳐 운신을 못하게 되자 읍으로 나왔다. 할머니들은 황 씨 가족이 입주하자 ‘모처럼 사람 사는 집 같다’며 좋아했다. 여덟 살, 일곱 살 된 남매의 재롱을 보면서 적적함을 달래고 성격이 활달한 황 씨가 딸처럼 살갑게 굴어 집 분위기가 밝아졌기 때문이다.
6가구가 나란히 이어진 공동주택 한가운데는 앞뒤가 툭 트인 쉼터가 있다. 쉼터에서는 월출산 너머로 뜨는 보름달이 한눈에 들어온다. 달뜨는집 식구들은 보름달이 뜨면 무슨 소원을 빌까. 할머니들은 “이 나이에 병원 신세 안 지면 됐지 소원은 무슨 소원”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달뜨는집에서 처음으로 명절을 맞는 황 씨는 이번 추석이 무척이나 기다려지는 표정이다. “보름달 보면서 소원을 빌면 진짜 이루어진다더군요. 저는 ‘직장을 갖게 해달라’고 빌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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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암=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