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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리뷰]황당한 스토리지만 감칠맛 대사는 팍팍 꽂히네

입력 | 2013-08-13 03:00:00

연극 ‘호랑이를 부탁해!’ ★★★☆




연극 ‘호랑이를 부탁해!’ LAS 제공

집 앞 길 건너 비디오 대여점. 고등학교 때 어머니 몰래 빌려 본 수많은 청소년관람불가 영화 중 ‘캣 피플’(1982년)이란 게 있었다. 입술을 살짝 벌린 채 초점 흐린 눈빛으로 무언가를 응시하는 나스타샤 킨스키의 흠뻑 젖은 얼굴이 커버 사진에 가득했다. 사람과 육체관계를 맺으면 표범으로 변하는,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가려면 살인을 저질러야 하는 종족에 대한 이야기였다.

‘호랑이를 부탁해!’는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2001년)를 차용한 제목에 ‘캣 피플’과 유사한 설정을 얹은 연극이다. 호랑이 유전자를 이용해 실험실에서 만들어 낸 ‘호랑이 인간’과 삼류 건달의 사랑. 문장으로 옮기기 민망할 정도로 허무맹랑한 내용이다.

밑그림이 시원찮으면 관객의 시선을 붙잡아 둘 다른 요소를 스토리 외곽에서 찾기 쉽다. ‘캣 피플’은 킨스키의 두 차례 짤막한 베드신을 미끼로 삼았다. 수입 배급 과정에서의 무도한 가위질 탓도 적잖았겠지만 호기심에 달떠 숨어서 본 그 영화는 결국 그저 길고 지루했다.

‘호랑이를 부탁해!’는 미끼를 드리우지 않는다. 황당하게 시작한 이야기를 끝까지 시침 뚝 떼고 몰아붙여 이어 간다. 일수 빚 500만 원을 못 갚아 온종일 쫓겨 다니는 한심한 백수건달 김현(권동호). 너저분한 몰골로 슬리퍼 끌고 편의점에 담배 사러 갔다가 500원이 모자라자 뒤에 서 있던 원호(김희연)에게 우격다짐으로 돈을 빌린다.

‘저렇게 만나서 사랑에 빠진다고…. 웃기고 있다 정말.’

집안에서 강요하는 결혼을 피하기 위해 계약을 맺고 가짜 연인 행세를 하다가 정분이 나는 흐름도 예상을 한 치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데 심드렁하게 지켜보던 중 귀에 꽂히는 대사들이 마음속에 슬쩍슬쩍 뜨끔한 공명을 일으킨다.

“호랑이면 어때요. 내가 상관없다는데. 당신은 당신이잖아요.”

있는 모습 그대로를 온전히 드러냈을 때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줄 이, 부모님 외에 세상에 몇이나 더 있을까. 살아오며 지어냈던 사랑 이야기가 처음부터 ‘말 되는 이야기’였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나. 생판 모르던 사람과 만나 사랑한다는 것 자체가 원래 말도 안 되는 일 아니었나.

모티브는 ‘캣 피플’이 아니라 ‘우연히 연분 맺은 호랑이가 자신을 희생해 인간을 도왔다’는 삼국유사 김현감호(金現感虎) 설화. 각각 6, 7개 역할을 호랑이 둔갑하듯 소화해 내는 조연 신창주 한송희가 과하지 않은 유쾌한 연기로 감흥의 밸런스를 잡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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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쁨 작·연출, 9월 1일까지 서울 혜화동 키작은소나무극장. 2만5000원. 070-8154-9944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