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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되기 전에 나도 그랬단다”

입력 | 2013-07-11 03:00:00

불량 친구들 만나 폭력 휘두르고 훔치고…
불우한 어린시절 딛고 일어선 소년재판 담당 고춘순 판사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자랐습니다. 본의 아니게 불량한 친구들과 어울리게 됐는데….”

소년재판을 담당하는 판사라면 하루에 수십 번도 더 듣는 ‘변명’이다. 하지만 고춘순 대전가정법원 판사(42·사진)는 그 뻔한 말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조용히 다독인다. “나는 그게 너의 본모습이 아니란 걸 안단다. 나도 그랬거든.”

고 판사는 중고교 시절 자타 공인 ‘문제아’였다. 강원 영월군 하동면 칠곡리 깊은 산골에서 자란 그는 중학교 3학년 때 탄광에서 일하던 아버지가 갱도 붕괴 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한 뒤부터 어렵게 생활했다. 추운 겨울 땔감을 구하지 못해 냉골인 방에서 오들오들 떨며 잠들기 일쑤였다. 인문계 고등학교 진학은 사치였다. 다행히 큰형수의 도움으로 남들보다 한 달 늦게 인문계 고교에 입학했지만 교과서도 없이 첫 등교를 할 정도였다.

그때부터였다. 소위 ‘논다’는 아이들이 ‘한 달이나 늦게 교과서도 없이 등교한 간 큰 놈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서 접근해 왔다. ‘열심히 공부하라’며 큰형수가 얻어준 학교 앞 자취방은 ‘본의 아니게’ 10대 청소년들의 탈선 아지트로 변해 있었다. 고2 때는 길가에 세워진 오토바이를 훔쳤다가 오토바이 주인에게 적발됐다. 그 주인은 경찰서로 넘기겠다며 어머니를 불러 오라고 했다. 어머니가 주인에게 사정을 하며 30만 원을 주고 겨우 합의를 봤다. 그때 어머니의 한마디가 가슴에 와서 박혔다. “다시는 안 그러리라 믿는다. 그게 너의 본모습이 아니란 걸 안다.” 실컷 야단맞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어머니에 대한 죄송함과 반성으로 바뀌던 순간이었다.

뒤늦게 공부에 전념한 끝에 강원대에 4년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고시원 총무로 틈틈이 일했다. 그래도 돈이 없어 수제비로 일주일 내내 끼니를 때우기도 했다. 2001년 사법시험에 합격했고 판사가 됐다. 그리고 올 2월 소년사건을 담당하게 됐다.

오늘도 고 판사의 법정에는 폭력 절도 등 온갖 비행을 저지른 10대들이 드나든다. 들어올 땐 까불대지만 고 판사의 인생 역정을 듣고 나면 아이들의 표정이 바뀐다. 고 판사는 말한다. “법정에서 20여 년 전 나와 내 친구들 같은 아이들을 다시 만납니다. ‘네 마음 다 알아’라는 한마디로 바뀌는 아이들이 생각보다 정말 많아요. 자신이 보석처럼 가치 있는 존재라는 걸 느끼게 해주고 싶어요.”

장선희 기자 sun1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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