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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북 카페]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

입력 | 2013-07-06 03:00:00

佛서 책 판매 싸고 때아닌 이념충돌
초조한 좌파, 극우논리 홍보해준 셈




프랑스 북부 파드칼레 지방의 작은 마을 베르크의 한 서점에서 판매가 됐다가 좌파의 반발을 불러 결국 판매가 철회된 아돌프 히틀러의 자서전 ‘나의 투쟁(Mein Kampf)’. 사진 출처 르피가로

프랑스에서는 동성결혼허용법이 통과되는 과정에서 이 법에 반대하는 우파와 찬성하는 좌파 간에 극심한 이념 대결이 벌어지고 있다. 이런 논란의 파장은 책 한 권의 판매 문제를 계기로 최근 출판계로까지 확대됐다.

동성결혼 문제에서 극우파는 보수 진영 및 가톨릭과의 강한 연대를 과시하며 상당한 여론의 지지를 얻었다. 특히 5월 파리 노르트담 성당에서 극우파 작가이자 역사학자인 도미니크 베네가 동성결혼법에 반대하며 권총 자살한 사건은 프랑스 사회에 큰 논란을 낳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프랑스 북부 파드칼레 지방의 베르크라는 작은 마을의 서점이 논란의 불씨를 제공했다. 이 서점이 아돌프 히틀러(1889∼1945)의 자서전 ‘나의 투쟁(Mein Kampf)’을 일반인에게 판매하고 있는 사실이 알려지자 좌파 정치권이 들고 일어나 일제히 비판하기 시작하면서 전국적인 논쟁거리로 번진 것이다.

‘나의 투쟁’은 뮌헨 폭동을 일으킨 히틀러가 수감된 시기(1924∼1925년)에 쓰인 것으로 나치당원의 필독서로 널리 읽혔으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여러 독재자가 남몰래 애독한 책으로도 유명하다. 지난달 북한의 김정은이 자신의 생일인 1월 8일 노동당 중앙위 부장들에게 읽어 보라며 선물한 것으로 알려져 화제가 되기도 했던 책이다.

공산당과 좌파전선은 즉각 “시대착오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며 당장 책의 판매를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문학계에서는 언론·출판의 자유 문제까지 뒤얽혀 논쟁이 벌어졌다. 책 판매를 옹호하는 쪽에서는 “이 책의 판매가 금지된 것도 아닌데 정치 세력이 들고 일어나 판매를 금지하라고 요구하는 게 말이 되느냐”고 반박했지만 좌파는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서점 주인은 지난달 29일 “나는 책의 내용에 전혀 공감하지 않지만 책을 원하는 사람들의 요청 때문에 새로 주문해 구비했던 것”이라며 “압력이 너무 많아 더는 팔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출판업계에서는 동성결혼법으로 극우파의 논리가 프랑스 국민에게 빠르게 흡수되고 있다고 판단한 좌파가 이율배반적인 행동을 하고 있으며, 오히려 ‘나의 투쟁’을 홍보해 준 꼴이 됐다는 지적까지 나왔다.

프랑스는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의 망령을 뼈저리게 경험한 뒤 전쟁이 끝나자마자 온 나라가 나치 부역자 청산에 나섰던 국가다. 하지만 유럽 경제위기가 확산되면서 프랑스는 물론 유럽 각국에서 실업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극우세력이 영토를 키우고 있다.

이번 ‘나의 투쟁’ 판매 중단 소동은 그런 맥락에서 볼 때 작금의 프랑스 좌파가 극우세력에 대해 느끼는 위기의식이 얼마나 심각한 수준인지를 보여 주는 좋은 실례가 될 것 같다.

파리=이종훈 특파원 taylor55@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