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 이후 제1인자… 한국서예의 신기원… 소전의 묵향 기리다
서예가 손재형의 독창적인 소전체를 보여주는 작품. 그림의 뜻이 선(禪)과 통한다는 뜻의 화의통선(畵意通禪). 성북구립미술관 제공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는 널찍한 땅에 자리한 승설암은 백양당출판사 주인 배정국의 집으로 수많은 책들이 들어찬 사랑채, 멋진 정원으로 이름난 곳이었다.
이날 소전은 상허의 요청을 받고 흙담 아래 수석이 놓인 고즈넉한 마당을 즉석에서 그려낸다.
깔깔한 붓끝과 간결한 구도로 완성한 소박한 풍경에 짙은 문기, 탈속의 경지가 스며 있다.
자연과 지성의 만남을 담은 ‘승설암도(勝雪<圖)’를 감상할 수 있는 드문 기회가 찾아왔다.
서울 성북동 성북구립미술관이 20세기 한국 서예의 거목인 소전(1903∼1981)을 재조명한 ‘소전 손재형(素전 孫在馨)’전이다. 작은 규모에 글씨 그림 전각 자료를 두루 담아냈다. 》
중국의 서법, 일본의 서도와 달리 소전은 ‘서예’라는 새로운 명칭을 주창해 현대서예운동을 이끌었다. 추사체 이후 독보적인 개성의 소전체를 창안한 서예 거장일 뿐 아니라 일본에 건너간 추사 ‘세한도’를 목숨 걸고 되찾아온 문화재 수집가로 불후의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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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사 이후 제1인자’ 서예가 소전
소전 손재형
전시장에는 그림의 뜻이 불교의 선과 통한다는 ‘화의통선(畵意通禪)’을 비롯해 넉넉한 필획과 절도 있는 운필을 특징으로 하는 작품들을 볼 수 있다. 서예가 손병철 씨는 “전서 예서풍의 필획과 현대적 조형언어로 국한문을 막론하고 하나의 법에서 나와 천변만화의 조화를 창출했다”며 “특히 한글 서예의 신기원 창출은 획기적 업적”이라고 평했다. 대중과 친숙한 잡지 ‘샘터’ ‘바둑’의 제호가 바로 소전의 글씨다.
○ ‘세한도’ 되찾은 수집가 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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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서예의 거장’으로 평가되는 소전 손재형을 기리는 전시에 선보인 ‘승설암도’. 소전은 당대의 예술가들이 교유하던 공간의 격조와 아취를 담백한 문인화로 표현했다. 성북구립미술관 제공
20세기를 대표하는 서예가로서, 소중한 문화유산을 지켜낸 수집가로서 소전의 혁혁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관심은 미미하고 연구는 척박하다. 한국화단의 원로 산정 서세옥 명예관장은 “선조들이 힘들게 한국의 멋, 격조 높은 문화를 지켜왔으나 이걸 제대로 알고 감탄할 사람이 많지 않다는 아쉬움에서 마련한 전시”라고 말했다. 이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세계 속의 한국만 찾다 보니 등잔 밑이 어둡게 돼버렸어.”
고미석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mskoh119@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