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준 산업부 차장
그냥 포기하고 돌아갈까 망설이던 둘은 조심스럽게 점원과 흥정을 시작했다. “저 시계 있잖아요. 100만 원이라고 돼 있는데 좀 깎아줄 수 없나요? 군데군데 흠도 있고, 바늘도 좀 휘어졌는데…. (심하게 후려친 게 아닌가 걱정하면서) 70만 원, 어때요?”
점원은 무표정하게 말했다. “그러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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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황을 되돌려 보자. 이번엔 점원이 호락호락 물러서지 않는다. “70만 원?” “여긴 에누리해주는 곳이 아니에요.” “그러지 말고 조금만. 75만 원.” “95만 원.” … “에이, 정말 갖고 싶어 하시니 85만 원에 드릴게요. 대신 현금으로 주세요. 다른 사람들에겐 절대 깎았다고 하지 마시고요.”
부부는 마치 자신들이 ‘협상의 달인’이라도 된 양 뿌듯해하며 가게를 나설 수 있었다.
가상의 예이지만 이처럼 협상은 당사자들이 단순히 물질적 목표를 교환하는 것 이상이다. 심리적 욕구까지 만족시켜야 잘한 협상이다.
이런 점에서 박근혜 정부와 여당의 협상력은 낙제점이다. 잇단 ‘인사 참사’로 핀치에 몰리자 진정성 없는 ‘17초짜리 대독(代讀) 사과’로 부글부글 끓는 이들에게 기름을 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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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이 여러 차례 미래창조과학부 원안 고수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 것 역시 협상 전문가들에겐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중요한 정보를 상대에게 알려 전력을 집중할 수 있게 도운 꼴이 됐다. 그 결과 정보통신기술(ICT)과 과학기술을 융합해 ‘창조경제’를 꽃피워야 할 미래부는 만신창이가 됐다. 어느 물건이나 구매자가 몸이 달아 덤비면 값은 오르기 마련이다. 노련한 말(馬) 흥정꾼은 마음에 드는 말을 봐도 초연한 척한다.
협상 전문가들은 이런 대통령의 행태를 놓고 “그가 ‘정치’가 아니라 ‘통치’를 하려 한다”고 비판한다. 통치자는 상대의 감정과 욕구에 둔감하다. 그래서 협상에 서투르다. 강한 상대를 만나면 어쩔 수 없이 양보하지만 그것은 ‘윈윈’ 협상이 아니라 양쪽 모두 정말 원하는 것을 포기해야 하는 ‘타협’일 뿐이다. 등산을 즐기는 남편과 바다를 좋아하는 아내가 휴가 갈 곳을 놓고 맞서다 산도, 바다도 있는 휴양지가 있다는 건 생각지도 못하고 한 발씩 양보해 영화관을 찾는 식이다.
이제 박 대통령은 훨씬 힘든 적을 상대해야 한다. 개성공단을 볼모로 대남(對南) 공세를 강화하는 북한 정권이다. 지금까지의 협상 상대는 단지 특정 사안에 관해 생각이 달랐을 뿐이라면 북은 본질적, 감정적인 반대자다. 양보하면 더욱더 양보를 강요받을 것이고, 수틀린다고 테이블을 엎을 수도 없다. ‘선거의 여왕’으로 불렸던 그는 대한민국 최고경영자(CEO)가 된 지금 ‘협상의 여왕’으로 거듭나야 한다.
정경준 산업부 차장 news9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