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가 가련해 빚 탕감한다”… 가문서 빈민구제 기구 운영
戰死노비 표창 요청 상서 경주 최씨 정무공 종가에서는 지금도 매년 노비 2명에게 제사를 지낸다. 이 전통의 기원을 보여주는 상서(上書·1812년)가 공개됐다. 병자호란 때 주인을 돕다 죽은 노비들을 국가의 충신으로 기려달라고 요청하는 문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1710년 경주 용산서원에서 일하던 노비가 원장에게 올린 청원서의 일부다. 용산서원은 경주 최씨 정무공 최진립 종가가 중시조인 최진립의 위패를 모셔놓고 직접 운영한 서원이다. 원장은 이 청원에 “형세가 대단히 가련하므로 빚을 탕감해준다”고 결정했다. 이 서원은 일종의 조사위원회인 ‘사핵소(査핵所)’를 구성해 채무자가 빚을 갚지 못하는 사유가 타당하면 빚을 탕감해줬다. 국가기관이 아닌 서원에서 제도적으로 빈민 구제책을 실시한 셈이다.
경주 최부잣집의 큰집인 경주 최씨 정무공 종가에서 조선 중기부터 사회지도층의 도덕적 책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진면목을 보여주는 고문헌이 무더기로 발굴됐다. 최부잣집은 ‘만석 이상의 재산은 쌓지 마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같은 가훈을 계승해온 대표적인 가문이다.
○ 노비에 땅 줘 생계 돕고 충노에 제사도
‘노비에 논밭 지급’ 문서 1702년 작성된 ‘용산서원 당중완의(堂中完議)’. 경주 최씨 정무공 종가가 운영한 용산서원에서 노비의 생계를 위해 논밭을 지급해주기로 결정한 사실을 적은 문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경주의 유림 34명이 경상감사에게 표창을 요청한 상서(上書·1812년)는 구전으로만 전하던 가풍의 기원을 확인해준다. “두 종이 만약 목숨을 구하고자 했다면 수풀 사이에 숨어 잠시 피가 그치길 기다리다 정신을 차리고 살아 돌아왔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지 않았으니 집안에서는 충노이고 국가에서는 충신 아니겠습니까.”
1702년 서원 소유의 노비에게 논밭을 지급해 생계를 마련해준 문서 ‘용산서원 당중완의(堂中完議)’도 있다. “노비들이 모두 한 뼘의 땅이 없어 살아갈 방도가 어렵다. 만약 돌보아 구휼할 길이 없다면 장차 흩어질 우려가 있기에 논밭을 주어 소작하게 하여 노비를 보존하게 할 일이다.”
이런 최씨 가문의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통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조선 중기에 노비·소작인과 지주 사이의 갈등, 즉 ‘노사갈등’을 겪은 뒤 타협책으로 화합의 길을 마련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이번에 발굴된 ‘최국선외(外) 서실입안(0失立案)’(1665년)에는 노사갈등 상황이 드러난다. 최진립의 셋째아들 최동량이 죽은 뒤 상중에 명화적(明火賊·밤에 횃불을 들고 약탈하는 도적) 100여 명이 쳐들어와 물건과 재산증명서 등을 훔치고 아들 최국선 형제 2명을 칼로 찌른 사건이었다. 최국선은 당시 상황과 빼앗긴 물건 목록을 적어 경주부윤의 공증을 받았다.
안승준 한중연 책임연구원은 “최씨 가문은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 타협한 끝에 상생의 길을 마련했고 그 산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탄생했다”고 설명했다.
:: 경주 최씨 정무공 최진립 종가 ::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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