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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육대란 부추기는 ‘뜬구름 법규’

입력 | 2013-02-22 03:00:00

2000채 아파트단지라도 40인 규모 어린이집만 갖추면 “OK”




지난해 셋째를 낳고 복직을 준비 중인 주부 김모 씨(29·서울 서초구 우면동)는 요즘 머리가 아프다. 세 살배기 둘째와 셋째가 다닐 어린이집을 구하지 못한 탓이다. 김 씨가 사는 서초구 우면2지구 서초네이처힐 아파트는 2011년 입주가 시작된 3252채 규모의 대단지로 0∼5세 영유아만 2124명에 이른다. 하지만 어린이집 보육정원은 12%인 247명에 불과하다. 김 씨는 “단지 내에서 못 구하면 둘째와 셋째를 매일 차에 태워 경기 과천시의 어린이집까지 가야 한다”며 “생계를 위해 하루빨리 복직을 해야 하는데 아이를 맡길 곳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0∼5세 무상보육이 전면 시행되면서 어린이집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지만 공급은 뒤따르지 못하고 있다. 특히 대단지 아파트를 지을 때 어린이집 정원을 현실과 동떨어질 정도로 적게 책정해 놓은 법규가 부모 가슴을 시커멓게 태우고 있다.

국토해양부의 ‘주택건설기준 등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300채 이상 주택단지 내에는 상시 21인 이상, 500채 이상의 경우 상시 40인 이상의 보육시설을 설치해야 한다. 하지만 그 이상에 대해서는 별도 정원기준이 없다. 이 때문에 사업비를 아끼려는 재건축 조합 등 사업주체들은 1000채, 2000채를 지어도 법정 최소 기준인 40인 규모의 보육시설만 짓는 경우가 많다. 서초구 관계자는 “방배동의 한 재건축 아파트는 의무 어린이집 설치를 피하기 위해 299채로 건축허가를 신청하기도 했다”며 “이 같은 현실을 감안해 공동주택 신축 시 세대규모에 비례해 어린이집이 더 많이 지어질 수 있도록 지난달 국토부에 규정개정을 건의했다”고 말했다.

국토부가 추진하는 ‘주민공동시설 설치 총량제’도 어린이집 부족현상을 부추길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현재 법제처에서 심의 중인 주택건설기준 등에 관한 규정 및 시행규칙 개정안은 어린이집, 경로당, 체육시설, 도서관 등 주민공동시설의 총량을 정하고 이 안에서 사업주체가 자율적으로 규모를 결정할 수 있게 했다. 이렇게 되면 사업성이 낮은 보육시설이나 노인복지시설은 지금보다 줄어들 개연성이 높다.

이 같은 비판이 나오자 국토부는 어린이집에 한해 의무설치규정을 유지하기로 방침을 바꿨다. 국토부 관계자는 “총량제를 하더라도 고시 형태로 어린이집 의무건축 방안을 마련할 것”이라며 “현행 기준에서 정원을 각각 10∼15명 늘리고, 1000채, 2000채 등에 대해서도 세부적으로 기준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영유아보육법도 어린이집 문턱을 높이고 있다. 직장어린이집 의무설치 사업장이 아닌 중소기업이나, 은행연합회 등 단체에서 어린이집을 설치하려 해도 입소 우선순위에 밀려 정작 소속 직원 자녀들은 들어가기 어렵다. 영유아보육법에 따르면 기초생활수급자, 차상위계층, 장애인자녀, 맞벌이, 다문화가족 등을 우선적으로 받아야 한다. 아파트에서도 이런 우선순위에 밀려 주민들이 자녀를 단지 내 어린이집에 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서울시 관계자는 “민간에서 설치장소를 제공하면 시가 비용을 지원해 저비용으로 국공립 어린이집을 확보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지만 입소 우선순위 조항 때문에 참여가 저조하다”고 말했다.

건물 일부만 어린이집으로 쓸 경우 1층에만 어린이집을 둘 수 있다는 조항도 걸림돌이다. 동 주민센터, 복지관 등 안전성이 보장된 공공건물에 어린이집을 설치할 경우 2, 3층에도 가능하도록 규정을 개정하면 저비용으로 더 많은 국공립 어린이집을 확보할 수 있다.

지난해 9월 민주통합당 남인순 의원이 어린이집 설치에 기여한 기업, 단체의 자녀가 일정비율로 우선 입소할 수 있도록 하고 300채 이상 공동주택에 국공립 어린이집 설치를 의무화하는 내용의 법안을 제출했다. 하지만 아직 국회 보건복지위원회에서 논의도 시작하지 못한 상태다. 남 의원은 “보육 수요가 높은 국공립어린이집 확충이 시급한 만큼 걸림돌 규정을 하루빨리 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재영 기자 redfoot@donga.com
이정규 인턴기자 동국대 사회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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