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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신석호]마이애미 쿠바 난민들의 실향가(失鄕歌)

입력 | 2013-01-21 03:00:00


신석호 워싱턴 특파원

“쿠바가 다시 자유를 찾더라도 복구하는 데 돈이 많이 들 겁니다. 우선 주민들에게 낡은 사회주의 집단주택 대신 새 단독주택들을 지어 줘야겠죠.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할 수 있는 자본주의 노동자로 탈바꿈할 수 있도록 교육도 해야 하고요. 낡은 공장과 도로도 개보수하고 전기와 수도 설비도 모두 새로 해야 할 것이고….”

열 살 때 조국 쿠바를 등지고 미국에 와 지금은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 시의 라틴아메리카상공회의소 소장으로 일하는 루이스 쿠레보 씨(61)는 14일 기자와 만나 이렇게 말하며 “그 돈을 누가 다 댈지 걱정”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1959년 혁명이 나기 전, 어린 그가 기억하는 조국 쿠바는 인구 600만 명에 물산이 풍부한 나라였다. 그는 “미국에 새 롤스로이스 자동차가 출시되면 이틀 만에 쿠바 대리점에 선을 보였을 정도”라고 회상했다.

하지만 피델과 라울 카스트로 형제, 체 게바라 등이 주도한 혁명 이후 쿠바 경제는 소련의 원조에 의존하는 ‘종속적 사회주의 체제’로 퇴행했다. 소련의 원유, 동독의 기계 등을 수입하고 대신 그들에게 설탕을 공급하는 ‘사회주의 분업체제’에 포함된 쿠바는 ‘설탕 단작(單作) 경제’의 농업국가로 전락했다.

쿠레보 씨는 “부모님과 함께 살던 집은 혁명 이후 일곱 가구가 모여 사는 집단주택으로 변했다”며 “하지만 나도 나이가 드니 어린 시절 추억이 담긴 그 집에 한번 가보고 싶다”고 눈시울을 적셨다. 그는 이날 발효된 라울 카스트로 정부의 주민 해외여행 제한 완화 조치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쿠바인의 대량 망명을 우려하는 미국이 비자를 쉽게 내줄 것 같아요? 여기 쿠바인들도 친척을 다 데리고 올 만큼 돈이 많은지 아세요? 그저 독재정치를 연장하려는 라울의 술수일 뿐입니다. ‘난 해외여행 갈 수 있게 해줬어’라고 생색을 내면서 쿠바인들이 ‘어떻게 하면 해외여행을 할 수 있을까’에 골몰해 정치적 불만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려는 거죠.”

한 달 전 미국으로 망명한 쿠바 외교부 대사 출신 이반 마르티네스 씨(57)도 이날 기자를 만나 “쿠바의 카스트로 형제 독재나 북한의 김씨 일가 세습 독재나 기본은 똑같다”며 “그들이 언제 국민들을 위해서 뭔가를 한 적이 있었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쿠바 정부는 소련 붕괴 이후 나라를 등진 해외 쿠바인들이 친척들에게 보내오는 송금으로 연명해 왔으며 혈육 간의 ‘감정’에 호소해 달러 수입을 더 늘리려는 것”이라고 이번 여행 제한 완화 조치의 경제적인 동기를 분석했다.

특히 쿠바에 막대한 양의 원유를 싸게 공급해주던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그의 사후를 걱정한 라울 정부가 고육지책으로 단행한 위기 대응 조치에 불과하다고 마르티네스 씨는 설명했다. 그는 “차베스가 죽으면 쿠바는 미국과 싸우고 있는 이란과 관계를 개선해 원유 공급처를 확보하려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카스트로 독재 체제 붕괴 이후의 쿠바를 걱정하는 쿠레보 씨, ‘쿠바는 카리브 해의 북한’이라며 목소리를 높이는 마르티네스 씨는 북한을 등지고 자유를 찾아 한국으로 온 여느 탈북 지식인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들과 대화하는 동안 강한 동지의식도 느꼈다.

한편에서는 부러움과 아쉬움도 밀려왔다. 동기가 무엇이건 쿠바 정부는 주민들의 해외여행을 확대하는 여유라도 부리고 있다. 마이애미 현지에서는 많은 쿠바인들이 부모와 형제자매를 미국으로 초청할 꿈에 설레고 있었다. 탈북했다 잡혀온 주민들을 고문하고 핵과 미사일을 개발해 주변 국가들을 위협하는 북한 정권은 한국에 정착한 탈북자들에게 2년 동안 친척 방문을 허가하는 일을 상상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마이애미에서

신석호 워싱턴 특파원 kyl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