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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문의 소설 속 인생]사랑보다 더 귀한 것을 지키고 싶었던 한 여인의 시련

입력 | 2013-01-16 03:00:00

조지 엘리엇의 ‘플로스 강가의 물방앗간’




내가 당신으로 인해 견뎌야 하는 어떠한 고통도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됨으로써 얻게 된 새 생명에 비하면 큰 대가가 아닙니다. 나는 당신이 내게 끼친 슬픔 때문에 슬퍼하지 않기 바랍니다. …그리고 나는, 이기적인 소망을 배제하는 경건한 사랑으로서, 당신 것입니다. (치욕에 떨어진 매기에게 보낸 필립의 편지 중에서)

19세기 영국 여성 작가들의 눈부신 진출 뒤에는 그것이 중상류층 여성에게는 입주 가정교사가 되는 것 말고 거의 유일한 생계수단이라는 비참한 현실이 있었다.

19세기 영국 여성에게 고등교육의 문호는 닫혀 있었고 사회 진출은 원천 봉쇄되어 있었다. 여성 작가들의 작가 수업 역시 혼자 소설을 탐독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메리 앤 에번스(필명 조지 엘리엇)는 이런 풍토 속에서도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 되어 남성의 영역에서 활동했다.

조지 엘리엇은 독학으로 여러 언어에 통달했고 철학, 신학, 역사, 과학 등 제반 학문을 넓고 깊게 섭렵해서 당대 최고의 지성인 오피니언 리더들의 포럼이던 ‘웨스트민스터 리뷰’의 편집장이라는 막중한 역할도 수행했다. 그가 이렇게 ‘명예 남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지독한 추녀였던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30대 후반에 조지 헨리 루이스라는 지적 반려이자 사랑의 반려를 만나게 되고 그의 권고로 소설을 쓰게 된다. 풍부한 식견과 심오한 성찰이 가득 담긴 대작들이다.

엘리엇의 두 번째 장편 ‘플로스 강(江)가의 물방앗간(The Mill on the Floss·1860)’에는 그의 어린 시절 충족되지 못했던 애정에의 갈구와 그가 겪은 여성으로서의 제약, 그리고 남다른 영적이고 지적인 욕망 때문에 겪은 많은 갈등이 담겨 있어 그의 일곱 편 장편 중에서 감성적 호소력이 가장 강한 작품이다.

맨 처음 아홉 살의 소녀로 등장하는 여주인공 매기는 감수성이 강하고 지적인 호기심과 상상력이 왕성해서 지극히 현실적이고 자기주장이 센 오빠 톰과 대조적이다. 매기는 톰을 헌신적으로 사랑하며 톰의 사랑을 갈망하지만 톰에게 여동생은 다른 친구가 없을 때는 데리고 놀고 심부름도 시킬 ‘계집애’일 뿐이다.

어린 나이에도 책을 많이 읽어서 별난 지식이 많은 영리한 딸을 아버지는 매우 대견해 해서 매기는 자랑스럽다. 그러나 공부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톰은 1년에 100파운드씩이나 드는 학교에 보내지고, 책만 잡으면 밥 먹기도 잊는 매기는 집에 남아 어머니에게서 어린 숙녀답게 뜨개질이나 자수를 배우고 집안일을 거들지 않는다고 매일 꾸중을 듣는다.

그런대로 목가적이던 어린 시절이 지나고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 아버지가 소송에 져서 파산한다. 톰은 하루아침에 어른스러워져서 이모부를 찾아가 일자리를 얻고 성실히 일해 말단직원에서 중견사원이 된다. 소규모로 시작한 투자도 크게 성공해서 그는 몰락한 아버지의 빚을 다 갚고 마침내는 남의 손에 넘어갔던 물방앗간을 다시 사들일 수 있게 된다.

오빠가 그렇게 집안을 다시 일으키는 데 아무 도움이 못 되었던 매기는 무력감에 몸부림친다. 매기는 영성(靈性)이 충만하고 고결한 자기희생의 삶을 갈망하지만 현실에서는 좁은 집안에 갇혀 어머니의 짜증과 불평이나 받아 내야 하는 삶을 산다. 오빠의 학교 친구이던 집안 원수의 아들 필립을, 반은 그의 장애에 대한 연민에서, 반은 지적인 세계로의 안내자로서 가족 몰래 만나다가 발각되어 심한 질책을 당하고 결별 선언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18세가 되어서 가정교사‘살이’를 떠나기 전에 매기는 사촌동생 루시의 약혼자 스티븐을 만난다. 착한 루시가 매기와 필립이 보트놀이를 할 수 있게 일을 꾸미지만 필립이 나타나지 않아서 스티븐과 보트를 타게 된다. 매기에게 매혹된 스티븐은 매기가 생각에 잠긴 사이에 보트를 계속 저어 그날 돌아올 수 없는 곳까지 간다. 매기 역시 스티븐에게 강렬히 끌리고 있었지만 정신을 차리자 스티븐을 심하게 꾸짖으며 스티븐의 간절한 구혼을 뿌리치고 다음 날 혼자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 오니 오빠 톰은 가문의 명예를 더럽혔다며 매기에게 해명할 기회도 주지 않고 내쫓는다. 친오빠에게서도 배척당한 매기에게 꽂히는 것은 동네 사람들의 비난과 경멸의 시선뿐이다. 그때 플로스 강에 홍수가 나고, 매기는 자기를 매정하게 내쫓은 오빠 톰을 구하려다가 남매가 함께 익사하고 만다.

매기가 마치 사촌동생의 약혼자를 꿰차려다가 버림받은 것 같은 모양새로 돌아오지 않고 그와 결혼해서 돌아왔더라면 세상은 뒷공론이 많아도 매기를 그 지방 제일 부호의 사모님으로 대접했을 것이다. 그러나 매기는 자기가 저지르지 않은 죗값까지 치르더라도 남의 불행을 대가로 행복을 거머쥘 수는 없었다.

조지 엘리엇은 인간이 자칫 실족하게끔 꼬이고 휘몰아치는 상황과 자신도 통제하기 어려운 감정의 해일을 면밀히 분석한다. 그러나 아무리 불가항력적 요인이 컸다 해도 인간의 행동에는 언제나 선택의 부분이 있고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함을 누누이 설파한다. 사람들이 상황이나 감정에 굴복해서 자기의 도리를 벗어난다면 공동체는 파괴되기 때문이다. 세상의 박해는 부당하지만 매기가 계속되는 스티븐의 절절한 구애를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이다.

182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이 작품은 한가롭던 시골 마을이 산업화하는 과정의 시대상을 보여 준다. 강가의 물방앗간을 소유한 사람은, 강물이 마르지 않는 한 아무에게도 꿀릴 것 없이 편히 살 수 있었으나 공업용수의 수요가 늘면서 털리버 씨는 수자원 이용권 소송을 하다가 파산한다.

서지문 고려대 교수·영문학

법률을 교묘히 이용해서 순박한 사람의 가업을 빼앗는 새 시대형 변호사와 대조적으로 털리버 씨는 구시대의 도덕률을 대변한다. 파산 후 집과 가재도구의 경매로 법적인 채무 변제는 끝났지만 폐인이 되다시피 하고서도 아들이 돈을 벌어 모든 채권자에게 빚을 전액 갚기까지 눈을 감지 못한다. 시대가 여성에게 용납하지 않았던 숭고한 삶을 갈망했던 매기는 결국 중세의 이단아 ‘마녀’처럼 세상의 오해와 박해 속에서 죽음으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한다.

다음 회에는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을 소개합니다.

서지문 고려대 교수·영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