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Narrative Report]미국에서 北 인권운동… 스칼라튜 HRNK 사무총장 ‘3國 인생유전’

입력 | 2012-12-28 03:00:00

루마니아에서 자라고… 한국에서 공부하고…
차우셰스쿠 24년 철권이 힘없이 무너졌다
내 조국과 닮은 北, 그 얼어붙은 땅에 희망을 뿌린다




그레그 스칼라튜 북한인권위원회(HRNK) 사무총장이 13일 미국 워싱턴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SAIS)에서 열린 북한 인권 세미나에서 발표하고 있다. 그는 북한 관련 세미나에 자주 연사로 참석하며 미 의회 북한 청문회에도 증인으로 여러 차례 출석했다.워싱턴=정미경 특파원 mickey@donga.com

1989년 12월 25일. 공개 처형장의 회색 벽 앞으로 한 남자가 끌려나왔다. 며칠 동안 혁명정부군을 피해 도망 다닌 초췌한 몰골이었다. 체념한 듯 담담한 표정이었다. 저격수 3명이 곧바로 총을 겨눴다. ‘서로 내가 쏘겠다’고 손을 든 저격수 후보 수백 명 가운데 선발된 최고 정예들이었다.

탕탕탕… TV중계된 독재자의 최후

‘탕 탕 탕 탕….’

한바탕 총성이 휩쓸고 지나갔다. 옆에서 대기하던 군인들이 기다렸다는 듯 흰색 천을 들고 나와 시신을 덮었다. 흰색 천이 빨갛게 물들었다.

10초 남짓. 24년 동안 폭압적 독재정치로 국민을 공포에 몰아넣었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루마니아 대통령의 최후에 걸린 시간이었다. 처형 장면은 TV를 통해 루마니아 전국에 중계됐다. 차우셰스쿠가 처형 직전 2시간 동안 형식적인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는 ‘쇼’ 같은 장면도 중계됐다. 다른 나라에서 크리스마스로 들떠 있을 때 루마니아 국민은 독재자의 종말에 환호했다.

그레그 스칼라튜 미국 북한인권위원회(HRNK) 사무총장(42)은 당시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 고교 3학년에 재학 중이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TV를 봤다. 변호사였던 아버지는 누구보다 차우셰스쿠를 미워했지만 “적법한 재판 절차가 무시됐다”며 화를 냈다. 하지만 스칼라튜는 법 절차를 생략할 만큼 깊게 고인 국민의 울분에 공감했다. 그렇다고 기쁘지도 않았다. 한순간에 이렇게 끝나는 것이 허무했다.

‘영원한 공산독재는 없다. 필연적으로 무너진다. 그리고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다.’

당시 그가 마음에 새겼던 메시지다. 지금도 처참한 북한 인권 상황을 접할 때마다 이를 다시 되뇐다. 북한 3대 독재가 아무리 견고할지라도 외부 충격과 내부 불만의 상승작용이 일어나면 한순간에 허물어질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체득했다.

루마니아에서 대학을 다니던 스칼라튜 사무총장은 공산주의 몰락 후 최초의 루마니아 유학생으로 한국에 건너와 10년 동안 살았다. 지금은 미국에서 북한 인권 운동을 벌이고 있다. 세 나라에서 살아온 길은 다르지만 이를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분모는 바로 북한이다. 그는 “북한은 내 머리 뒤편에 언제나 무겁게 자리 잡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북한에 관심을 가진 것은 조국 루마니아가 동유럽에서 북한과 가장 닮은꼴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루마니아는 민주화 이전 동유럽 사회국가 가운데 가장 혹독한 독재체제였다.

北주민들의 광적인 환영식 지금도 생생

그레그 스칼라튜 북한인권위원회(HRNK) 사무총장이 21일 미국 워싱턴의 사무실에서 북한 지도를 짚어가며 기자에게 북한 문제를 설명하고 있다. 그는 “한 번도 북한에 가보지 않았지만 북한 연구를 하다 보니 북한 지역 사정을 훤하게 알게 됐다”고 말했다. 워싱턴=정미경 특파원 mickey@donga.com

지금도 기억나는 건 1971년 북한을 방문한 차우셰스쿠가 김일성의 환대를 받는 장면이다. 루마니아 TV에서는 수백 번 방송됐다. 루마니아 민속의상을 입은 환영단이 루마니아 민요를 부르고 길거리를 가득 메운 주민들이 루마니아 국기를 흔드는 광적인 북한식 환영 행사에 차우셰스쿠는 넋이 나간 듯했다.

옛 소련의 영향력을 싫어했던 차우셰스쿠는 북한을 롤모델로 삼아 1인 독재와 주체사상을 그대로 루마니아에 옮겨왔다.

국민의 삶은 피폐해졌다. 어린 스칼라튜는 초등학교 때부터 강제노동에 동원됐다. 시골 농가에서 사과를 따고 감자를 캐는 지루한 일과는 끝이 없을 것만 같았다. 아버지가 변호사, 어머니가 언어학 교수인 유복한 가정이고 최고의 국립초등학교를 다녔지만 노동에는 예외가 없었다. 큰 바구니 3개에 사과를 꽉꽉 담아야 했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다고 맞는 일은 없었다. 일을 끝낸 친구들이 버스에서 지켜보고 있는 동안 감자를 캐야 했다. “너 때문에 집에 못 간다”는 친구들의 야유엔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때의 굴욕 때문일까. 그는 지금도 사과와 감자는 입에도 대지 않는다.

1980년 중반 서방국가들이 루마니아에 외채를 상환하라고 압박했다. 경제는 파탄 지경이었다. 스칼라튜는 학교에 다녀오자마자 우유를 배급받기 위해 줄을 섰다. 온 가족이 돌아가며 줄을 섰다. 계란은 일주일에 두 개씩 배급됐다. 너무도 추운 날씨. 잠자리에 들 때 옷을 벗는 게 상식이지만 루마니아인은 잠들기 위해 옷을 껴입어야만 했다.

서슬 퍼렇던 독재시절. 차우셰스쿠가 스칼라튜가 살던 지역을 방문했다. 길거리를 활기차게 보이게 하기 위해 앙상한 나뭇가지에 초록색 페인트를 칠하는 촌극이 벌어졌다. 선반이 텅텅 비었던 상점에는 식료품들이 꽉꽉 들어찼다.

주민 감시는 차우셰스쿠가 김일성에게서 배운 또 다른 독재술이었다. 고교 시절 스칼라튜 사무총장이 등교할 때마다 어머니는 그의 눈을 보며 말했다. “사람 많은 데 가지 마라.” “친구 믿지 마라.” 단 두 마디의 당부였다. 친구들이 모여 있으면 뒷걸음질쳤다. 반정부 대화를 나누는 데 끼었다가 나중에 발각되면 퇴학은 물론이고 부모까지 끌려가 고초를 당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 친구의 텅 빈 책상을 보는 일도 잦았다. 아무도 무슨 일인지 묻지 않았다. 공포와 침묵의 사회였다. 어머니는 당국의 여행허가를 받지 못해 서울에서 대구 정도 거리에 불과한 옆 나라 불가리아의 학술세미나에 참석하지 못했다.

반정부 시위 일주일 만에 세상이 변했다

끝없이 암울하던 시간. 세상은 갑작스럽게 변했다. 1989년 반정부 시위가 들불처럼 번지고 혁명정부가 들어서 차우셰스쿠를 총살한 일까지 모두 일주일 안에 일어났다.

당시 대다수 루마니아인처럼 스칼라튜 역시 혼란스러운 국내를 떠나 외국으로 나가고 싶었다. 기회는 우연하게 찾아왔다. 부쿠레슈티대 영문과 1학년이었던 그는 어느 날 개방화 흐름 속에 쏟아져 들어온 프랑스 책을 우연히 보다가 한국에 대해 알게 됐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책이었다. TV에서 북한이 남한보다 훨씬 잘사는 나라라고 귀 따갑게 듣던 그는 한국의 발전상을 보여주는 책을 한 장 한 장 넘겼다. 처음엔 어리둥절했다. 하지만 속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러면서 북한과 마주 보는 한국에 가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는 학교 과제로 한국의 발전에 대한 에세이를 썼다. 담당 교수의 권유로 1990년 3월 한-루마니아 수교와 함께 이뤄진 한국 정부의 국비유학생 시험에 합격했다. 루마니아 최초의 한국 유학생에 선발된 것. 비행기 창밖으로 줄줄이 늘어선 고층 아파트를 내려다보는 감격은 달리 표현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처음 밟아보는 외국 땅이었다.

한국생활 10년… 광고 찍고 결혼까지

서울대 외교학과에 편입한 그는 2000년 미국으로 건너오기까지 10년 동안 한국에서 생활했다. 학사·석사학위를 받는 동안 한국말로 수업을 듣고 논문을 쓰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따라갈 만했다.

한국에선 ‘유명인’이었다. 학비를 벌기 위해 방송인으로 나섰다. 이다도시, 하일(로버트 할리) 등 한국어를 잘하는 외국인들이 방송에 진출하던 시기였다. 그 역시 리포터, 토크쇼 패널로 TV 전파를 탔다. 여배우 김혜수 씨와 국제전화 광고도 찍었다. 당시 방송 관련 회사 직원이었던 부인과 결혼도 했다. 그러나 선진국 출신인 다른 외국인 방송인과의 괴리감은 메우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의 학문적 관심사는 북한이었다. 그러나 그가 본 한국은 북한에 관심이 없는 나라였다. 1994년 북한의 핵위기로 한반도에 전쟁 위기가 닥쳤지만 친구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였다. 이해할 수 없었다. 한국인은 북한 얘기를 귀찮아하는 듯했다. 친구들에게 남북통일에 대해 물으면 “통일이 언젠가 이뤄지면 좋겠지만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안 이뤄졌으면 좋겠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北현실 외면하는 한국친구들 이해 못해

그나마 북한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은 ‘운동권 친구’들뿐이었다. 이들과 신림동 뒷골목에서 술도 많이 마셨다. 술자리에서 한국 친구들은 사회주의 찬가인 ‘인터내셔널가(Internationale)’를 불렀다. 그에게도 부르라고 권했다.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공산주의의 실상을 경험한 그로서는 차마 그런 노래를 부를 수 없었다.

공부를 마쳤다. 루마니아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아무리 민주화되고 나라가 변했다지만 어린 시절 힘든 기억이 떠나질 않았다. 루마니아에서는 미래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공산주의 체제와 인권에 대해 더 연구하려면 한국보다 미국이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의 선택은 미국 터프츠대 외교관계대학원 플레처스쿨. 방송 활동으로 모은 돈을 학비로 썼다. 주한 미국대사를 지낸 스티븐 보즈워스 학장이 담당 교수였다. 국제인권법을 공부하고 북한 인권을 주제로 두 번째 석사학위를 딴 그는 미 국무부 산하의 국제개발처(USAID), 유엔 산하의 국제노동기구(ILO) 등에서 일했다. 국제개발 업무를 담당하면서도 언젠가는 북한 관련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지난해 HRNK 사무총장으로 일해 달라는 제안을 받고는 뛸 듯이 기뻤다. 2002년 설립된 HRNK는 북한 인권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연구단체. 탈북자 송환, 북한 정치범수용소 철폐 등의 문제를 미국에 알리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미 의회 북한 관련 청문회의 단골손님이 됐다. 그는 “지금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며 “굴곡진 길을 돌고 돌아 이제야 내 인생의 목적지에 온 듯하다”고 말했다.

기자와 얘기를 끝내며 “루마니아 공산독재의 종말처럼 북한의 급변 사태도 언제 닥칠지 모른다”고 강조했다. 그때를 대비해 한국은 물론이고 국제사회가 북한을 다양한 각도에서 연구하고 대비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조언이다.

“공산독재는 영원할 듯하지만 무너지게 돼 있다. 내가 그 현장을 지켜본 목격자 아니냐.” 그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워싱턴=정미경 특파원 mickey@donga.com
▶ [채널A 영상] 미 청문회서 탈북자 모녀 ‘충격 증언’

▶ [채널A 영상] 북한 주민들은 ‘통일’을 원할까요?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