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규 객원논설위원·한림대 교수
황제직을 入札한 고대 로마
2012년 12월 대한민국 대통령선거에서도 이와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18대 대통령이 되기 위해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는 131조 원짜리 ‘선택적 복지’를 국민에게 약속했다. 이에 질세라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는 192조 원짜리 ‘보편적 복지’를 내세웠다. 2세기 로마였다면 더 큰 복지를 약속한 문 후보가 승리했겠지만, 좌파의 실책과 우파의 결집 덕분에 12월 대선에서는 박 후보가 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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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승자의 저주’부터 살펴보자. 대륙붕 석유 개발권 경매에서 ‘새누리’사가 6조 원을, ‘민주’사가 4조 원을 써낸 경우를 가정해 보자. 대륙붕 개발의 사후(事後)적 수익은 어느 회사가 개발해도 동일하다. 사후적 수익은 두 입찰 금액의 평균값인 5조 원 근처다. 이는 여론조사기관들의 대선 예측치가 사후적 실제 값을 중심으로 고르게 분포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 경우 승자인 새누리는 1조 원의 손실이 예상된다. 이것을 ‘승자의 저주’라 부른다. 실제로 1950년대 미국 멕시코만 석유 개발권 경매에서 거대 정유사들이 이 저주를 제대로 계산 못해 큰 손실을 입었다.
대통령직을 놓고 벌이는 복지 경쟁 역시 ‘승자의 저주’에 빠지기 쉽다. 수익에 민감한 민간 기업들은 입찰 시 ‘승자의 저주’를 고려해 입찰가를 하향 조정한다. 하지만 ‘내 돈’이 아닌 ‘국민 돈’을 쓰는 복지 경쟁의 경우 각 당은 ‘승자의 저주’를 고려할 인센티브가 전혀 없다.
설상가상으로 복지 경쟁에서의 ‘승자의 저주’는 ‘소모전’에 의해 더욱 악화된다. 대선 승리를 위해 각 당은 인적 물적 시간적 자원을 쏟아붓는다. 승리한 당은 공직이나 ‘낙하산 인사’ 등을 통해 그간 쏟아부은 자원을 보상받을 수 있지만 패배한 당은 거의 아무것도 못 건진다. 이런 게임 구조를 ‘소모전’이라 부른다.
망국적 복지 포퓰리즘 막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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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 때 새누리당보다 더 큰 복지 확대를 주장하던 민주당이 이번에는 국채 발행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 모순이긴 하지만 야당의 존재 이유를 잘 보여줬다. 건전 재정은 세계 경제위기에 대처하는 우리 경제의 마지막 버팀목이다. 우리가 1998년의 ‘IMF 경제위기’를 극복하는 데는 당시의 건전 재정이 큰 역할을 수행했다. 박 당선인이 25일 내년도 예산안 처리 문제와 관련해 “재정 건전성을 감안해 국채 발행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힌 것은 올바른 판단이다.
그러나 내년이야 그렇게 넘어간다 해도 앞으로 5년간 131조 원 공약을 실행하려면 대규모 국채 발행은 불가피하다. 이를 최소화하려면 131조 원 중 ‘승자의 저주’와 ‘소모전’ 때문에 늘어난 액수를 축소 조정해야 한다.
‘신뢰의 박근혜’에게 공약 축소는 독배나 다름없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우리나라가 유럽이나 일본의 망국적 복지 포퓰리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공약 축소가 유일한 길이다. 우리 국민은 192조 원 대신 131조 원을 선택했다. 얼마나 현명한 국민인가. 만약 박 당선인이 진정성을 갖고 공약 축소의 불가피성을 설득한다면 우리 국민은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새 국가 지도자를 위해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모든 가혹행위는 한 번에 끝내야 한다. 그래야만 덜 고통스럽고 반감을 일으키지 않는다.” 박 당선인은 이 충고를 받아들여 대통령 취임 전에 공약 축소 문제를 단칼에 해결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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