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49개-외국 7개 코스 설계… 골프장 디자이너 송호 대표
골퍼들을 골탕 먹이길 좋아하는 심술궂은 설계자인 줄 알았다. 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필드에 나가는 골퍼들이 더 큰 문제였다. 한국의 대표적인 골프장 디자이너인 송호 대표는 “생각하는 골프를 하면 더 쉽고 재미있게 골프를 즐길 수 있다”고 조언했다. 송 대표가자신이 설계한 드비치CC의 조감도 옆에서 활짝 웃고 있다. 성남=최혁중 기자 sajinman@donga.com
#2. ‘오잘공(오늘 잘 맞은 공)’ 두 번으로 투온을 해냈다. 마음속은 벌써부터 ‘최소한 파, 잘하면 버디’를 외친다. 회심의 퍼팅. 하지만 이게 웬걸. 공은 급격한 내리막을 타고 그린과 에이프런을 지나 러프까지 굴러간다. 졸지에 네 번째 샷은 웨지를 잡아야 한다. 버디가 더블 보기로 돌변하는 건 한순간이다.
주말골퍼라면 누구든 한 번쯤 경험해 봤음 직한 일들이다. 돈 들이고 시간 쪼개 스트레스 풀러 간 골프장에서 이런 경우를 당하면 속된 말로 ‘멘붕(멘털 붕괴)’에 빠진다. 대다수 골퍼는 자신의 실력을 탓하기보단 애꿎은 골프장을 원망한다. “뭐 이런 코스가 다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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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공격적인 질문에도 그는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시종 웃음 띤 얼굴로 주말골퍼들이 좀더 쉽고 재미있게 골프를 즐기는 방법에 대해 설명했다. 한마디 한마디가 알아두면 피가 되고 살이 될 ‘명언’이었다.
○ “머리 좋은 사람이 골프를 못 칠 순 있지만 머리 나쁜 사람은 골프를 잘 칠 수 없다.”
여기서 머리는 지능지수(IQ)를 의미하는 게 아니다. 기억력, 공간 지각력, 상상력이 바로 머리다. 요즘 골프는 쇼트 게임, 특히 그린에서의 변별력을 테스트한다. 언듈레이션(높고 낮은 굴곡)이 많은 것도 골퍼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해서다. 어떻게 굴려야 핀에 붙일 수 있는지 생각하고 쳐야 한다.
하지만 대다수 주말골퍼는 가장 중요한 그린 퍼팅 라이 읽는 것조차 캐디에게 맡긴다. 생각 없이 놓인 대로 공을 치면 재미도 없고 실력도 늘지 않는다. 생각하고 치는 골프를 해야 한다. 어떤 골프장을 가더라도 홀마다 왜 이쪽에 벙커가 있고, 저쪽에 해저드가 있는지 생각하고 치라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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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급자 수준의 주말골퍼들이 범하기 쉬운 오류 하나. 핸디캡 1번 홀이건 18번 홀이건 똑같이 파를 잡으려 한다는 것이다. 설계자가 핸디캡 1, 2번 홀을 만들 때는 다 이유가 있다. 난해한 과제를 주고 골퍼를 유혹하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면 엄청난 쾌감을 주지만 실패하면 그에 상응하는 페널티를 주겠다는 거다. 섣불리 덤비면 트리플 보기 또는 더블파(일명 양파)를 기록하기 십상이다. 어려운 홀에서 가속기를 밟으면 큰일난다는 메시지다. 골퍼들은 화가 나겠지만 나는 뒤돌아서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물론 나 스스로도 내가 파 놓은 함정에 빠지기도 한다.
이런 홀은 처음부터 돌아가는 게 정답이다. 인생 역시 가속기를 밟아야 할 때가 있고 브레이크를 밟아야 할 때가 있는 것처럼 골프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보기를 하겠다고 마음먹으면 무척 쉬운 게 골프다. 아마추어에게 파는 어렵고 보기하기엔 쉬운 골프장이 요즘의 흐름이다.
○ “골퍼의 모든 샷은 가치가 있다.”
내가 설계하는 모든 골프장은 쉬운 티샷을 보장한다. 드라이버 샷이 잘 맞든, 안 맞든 잔디밭 위에는 있게 만든다. 하지만 샷에 따른 보상도 확실하게 한다. 밸류(가치)가 높은 티샷에는 그린이 잘 보이게 만들고, 그렇지 않는 샷에는 확실한 차등을 둔다. 쇼트 게임은 더욱 그렇다. 그린에 언듈레이션을 많이 주지만 핀 주변 5∼6m는 평평하게 만들어 잘 친 샷에는 얼마든지 버디나 파를 노릴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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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골프장은 영원히 남을 문화유산이다.”
내가 생각하는 골프 코스는 문화유산이다. 내 아들과 손자가 골프를 칠 곳이기에 나무 하나, 벙커 하나를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래서 대중적이면서도 작품성 있는 코스를 만들려고 한다. 지금까지 여러 골프장을 설계했지만 100% 마음에 드는 곳은 아직 없다. 이런 점이 좋으면 저런 점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골프장 디자이너로서 최고의 골프장을 만들기 위해 바라는 것은 딱 세 가지다. 구릉지 형태의 좋은 지형을 만나고, 설계자의 뜻을 마음껏 펼칠 수 있게 법적인 인허가가 까다롭지 않으며, 의뢰인이 설계자를 믿고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걸 맡겨주는 것이다. 그런 조건이 주어진다면 움막을 짓고 그 옆에 살면서 몸과 마음을 바쳐 ‘꿈의 코스’를 만들고 싶다.
성남=이헌재 기자 un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