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해주 정씨 문중 고문서 1400점 발굴… 80점 보물지정 추진
‘영응대군 기별부인(棄別婦人) 정(鄭)씨 분급문기’(1494년)의 일부. ‘재주(財主) 영응대군 기별부인 정’(선)이라 쓰고 도장을 찍었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세종의 며느리가 이혼한 뒤 조카에게 남긴 분재기(分財記·상속문서) 일부다. 세종의 여덟 번째 아들 영응대군(1434∼1467)의 두 번째 부인인 춘성부부인(春城府夫人) 정씨는 1494년 ‘영응대군 기별부인 정씨 분급문기’에서 자신을 ‘이혼한 여인(기별부인)’이라고 칭한 뒤 도장을 찍었다. 조선 초기에는 이혼을 기별(棄別)이라 했는데, 이혼한 여인 스스로 ‘기별부인’이라고 칭한 문서가 발견된 것은 처음이다. 이 문서를 통해 조선 초기 이혼한 여인의 제사를 친정에서 맡았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 분재기를 비롯해 조선 초기 서울 양반가문 및 왕실의 생활상을 상세히 보여주는 보물급 고문서가 대량으로 발굴됐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지난해 11월 해주 정씨 대종가로부터 문중에 전해지는 조선시대 고문헌 1400여 점을 연구 의뢰받아 해독하는 과정에서 조선 초기 생활상을 밝혀주는 희귀자료를 여럿 찾아냈다고 9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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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승준 한중연 장서각 책임연구원은 “서울 양반가문의 고문헌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 중 대부분 없어져 그 학술적 문화적 가치가 크다”고 말했다. 한중연은 정씨부인의 분재기를 포함한 해주 정씨 고문헌 80여 점에 대해 일괄 보물 지정을 추진할 계획이다.
세종은 자녀 22명 가운데 영응대군을 가장 아껴 임종도 그의 집에서 맞았다. 영응대군에게는 첫 부인 여산 송씨가 있었지만 세종은 송씨가 병에 걸렸다며 그를 쫓아냈다. 세종이 영응대군의 둘째 부인으로 간택한 인물이 정씨였다. 영응대군은 정씨와 결혼한 뒤에도 송씨와의 사이에서 두 딸을 낳았고, 세종이 죽자 정씨와 이혼하고 송씨를 다시 부인으로 맞았다. 남편에게서 버림받은 정씨는 자신이 죽으면 제사를 지내 달라며 1494년 친정조카 정미수(경혜공주의 아들)에게 노비와 논밭을 상속하는 문서를 남긴다.
안 연구원은 “정씨가 기별부인을 자칭한 것은 이혼 뒤 누군가의 딸이나 부인이 아닌 독립적 존재로서 당당하게 살았음을 뜻한다”고 분석했다.
고모 정씨의 재산을 상속받은 정미수는 15년 뒤 자신이 고모 정씨보다 먼저 죽을 것을 예상하고 양자 정승휴에게 정씨의 제사를 부탁하며 노비를 물려준다. 이때 작성한 ‘정승휴 별급문기(別給文記·1509년)’도 발견됐다. 정미수 역시 이 문서에서 고모 정씨를 ‘영응대군 기별부인’으로 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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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연은 18일 ‘조선시대 해주 정씨의 고문헌과 역사·문화 연구’ 학술대회를 열어 연구결과를 발표한다.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