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야구의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금광옥 동산고 감독. 금 감독은 모교 동산고에서 후배들을 육성하며 여전히 인천야구를 지키고 있다. 인천|김종원 기자 won@donga.com 트위터 @beanjj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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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삼미 김진영감독 항의중 발차기
구속 수감…팀 와해돼 전기우승 수포로
34세 허구연의 청보 핀토스 신선한 충격
1985년에 메이저리그식 선진야구 도입
1989년 김성근 취임…전설의 극기훈련
오대산서 맨발로 눈밭 걷고 얼음물 입수
지원 빵빵 현대 유니콘스 ‘내 최고의 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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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경기는 TV로 생중계됐다. 당시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청와대에서 난리가 났다. 사회정화의 서슬 퍼런 바람이 불던 시절이었다. 삼미는 다음날 부산으로 이동했다. 구덕구장으로 형사들이 급파됐다. “경기 도중이라 덕아웃으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형사들이 수갑을 들고 밖에서 기다렸다.” 삼미 선수단은 경기 뒤 김 감독을 따로 빼돌렸다. 그러나 형사들이 숙소로 찾아왔다. 김 감독은 결국 구속됐다. 11일 뒤 김 감독은 돌아왔으나 삼미는 예전의 팀이 아니었다. 전기 우승 매직넘버 11을 남겨놓고 고비였던 해태와의 광주 3연전(6월 7∼9일)에서 모두 패하며 결국 우승에서 멀어지고 말았다.
1983년 6월 1일 잠실 MBC전에서 삼미 김진영 감독(오른쪽)이 심판에게 격렬히 항의하고 있다. 이 사건이 발단이 돼 김 감독은 구속됐고, 삼미도 힘을 잃었다. 스포츠동아DB
○청보 핀토스, 짧지만 강렬했던 기억
1985년 전반기를 마치고 삼미는 사라졌다. 금광옥에게 새 유니폼이 지급됐다. 청보 핀토스였다. 새 술은 새 부대에. 1986년의 사령탑은 당시 34세의 젊은 방송해설가 허구연이었다. “허 감독은 젊어서 선수와 같이 러닝을 할 정도였다. 선진야구도 도입했다. 훈련 때 점심도 먹지 않았다. 과일이나 가벼운 음식을 먹고 곧바로 훈련했다. 감독이 식사시간 때 오래 있는 것을 싫어했다.” 메이저리그식 훈련이었다. 선수들은 허기져 했다. 요즘 프로팀에서 대부분 하는 훈련도 많이 했다. “라인을 그어놓고 번트를 시켰다. 일주일 동안 번트를 해서 원 안에 많이 집어넣은 선수에게 상을 주는 방식이었다. 권두조 코치가 그 훈련을 담당했다.” 방식은 새로웠으나 선수들이 따라가지 못했다. 청보의 성적은 여전히 나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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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보의 상징 조랑말. 한동안 불펜카 대신으로 썼다. 선발투수들은 조랑말을 타고 마운드에 올랐다. 문제는 조랑말이 큰 소리에 민감하다는 것. 관중의 함성에 놀라 말이 뛰는 바람에 사고가 날 뻔했다. 말이 그라운드에 똥을 싸는 바람에 그것을 치우느라 경기가 지연된 적도 있었다. “전반기 휴식 때였다. 김정우 구단주가 선수들을 청평의 별장으로 불렀다. 그곳에 갔더니 코미디언 고(故) 이주일 씨와 유명한 여자 연예인들이 많이 있었다. 구단주가 선수들과 함께 재미있게 논 기억이 난다.”
1985년 34세의 젊은 나이로 청보 핀토스 사령탑으로 취임한 허구연 해설위원은 역대 프로야구 최연소 감독으로 남아있다. 스포츠동아DB
○태평양 돌핀스와 ‘김성근식 야구’
1988년 청보는 태평양으로 넘어갔다. 박영길 감독이 첫해 지휘봉을 잡았고, 1988시즌이 끝난 뒤 김성근 감독이 부임했다. 태평양 본사에 선수들이 집합했다. 김 감독의 취임사는 이랬다. “너희들에게 김성근 야구가 어떤 것인지 알려주겠다. 앞으로 김성근 야구를 세뇌시킬 것이다”고 했다. 그리고 1989년 1월 10일 오대산으로 떠났다. 프로야구 역사상 전무후무한 극기훈련의 시작이었다. 6박7일의 상상 못할 훈련. ‘변 도사’라고 불리는 사람이 극기훈련을 이끌었다. 김 감독은 훈련에 관여하지 않았다. 벌써부터 시즌 구상에 들어갔다. 1년 치 계획을 산 속에서 세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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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해를 끝으로 금광옥도 현역생활을 접었다. 선수생활 말년 때 외야수로 나갔다. 인하대에서 수비훈련을 하다 펜스에 부딪치면서 손목이 젖혀지는 부상을 당했다. 김 감독이 “그냥 따라다녀라”라고 했다. 출전하지는 않지만 쉴 수는 없었다. 솔선수범해서 배팅볼을 던졌다. 선참이 알아서 희생하자 코치들도 좋아했다. 금광옥은 김 감독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이제 야구를 놓아야겠습니다. 감독님이 판단해서 제 앞길을 열어주세요. 지도자의 길을 걷고 싶습니다.” “그럼 오늘의 일은 비밀로 하고 기다려라.” 김 감독은 몇 달 뒤 그를 불렀다. 금광옥은 지도자의 길에 들어섰다. 프로통산 7시즌 동안 타율 0.235, 29홈런, 125타점을 남겼다. “선수 때는 별로 좋은 기억이 없었다”는 금광옥이다.
○현대 유니콘스와 SK 와이번스
1996년 현대가 오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풍족한 지원을 했다. 현대의 손은 컸다. 필요한 것은 뭐든지 다 해줬다. 1998년 마침내 현대는 인천구장에서 한국시리즈 우승의 감격을 누렸다. “야구인생에서 가장 기억나는 순간이다. 지금도 그런 팀은 없다고 생각한다.”
좋았던 시절은 오래가지 못했다. 1999년 현대의 인천구장 개막경기. 관중이 가득 차지 못했다. 그것이 수원으로 떠나는 계기가 됐다. 이후 현대는 인천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야구계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인천구장 인근의 ‘청보갈비’도, 최창호의 아버지가 운영하던 ‘최프로 슈퍼’도 이제 야구팬들의 아련한 기억 속으로 사라졌다.
금광옥은 다시 인천으로 돌아왔다. 김성근 감독이 부임하면서 SK의 원정기록원이 됐다. 4년간 밖에서 경기를 지켜보면서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던 중 모교 동산고에서 야구부를 맡아달라는 연락이 왔다. 김 감독도 SK에서 물러난 터였다. 마지막 희생을 해달라는 교장선생님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후배 위재영, 윤용하 등과 자신이 땀 흘렸던 모교의 그라운드로 돌아와 제자들과 함께 뛰는 이유다.
전문기자 marco@donga.com 트위터 @kimjongk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