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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황태훈]열정이 만든 류현진의 ‘인생 역전’

입력 | 2012-11-21 03:00:00


황태훈 스포츠레저부 차장

#추억 1

그때는 그랬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인천 동산고 1학년 때인 2003년 겨울. 왼 팔꿈치 인대 접합수술을 받았다. ‘공을 못 던질 수도 있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겉으로는 웃어 넘겼다. 주위 사람들로부터 동정 어린 시선을 받고 싶진 않았다.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인천 집에서 서울의 한 병원을 오가는 지루한 생활이 반복됐다. 그렇게 1년을 참고 견딘 뒤 예전의 빠른 공이 되살아났다. 팔꿈치의 고통도 사라졌다. 고3 때 미국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이 찾아왔다. 당시 LA 다저스는 30만 달러(약 3억2000만 원)를 제안했다. 헐값이었다. 팔꿈치 수술 전력과 군 입대 문제를 이유로 들었다. 그렇게 미국으로 갈 순 없었다.

#추억 2

올 시즌 직후 한화 구단 고위 관계자를 만났다. “메이저리그의 포스팅(비공개 경쟁 입찰) 가이드라인 금액을 얼마로 생각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1000만 달러(약 108억 원)”라고 답했다. “그 정도 대우를 받지 못하면 한화에 남겠다”고도 했다. 구단은 흔쾌히 수락했다. 그리고 이달 11일 한화는 다저스의 포스팅 응찰액 2573만7737달러33센트(악 280억 원)를 수용했다.

‘괴물’ 류현진(25)이 ‘인생 역전(逆轉)’을 이뤘다. 괴물은 프로 입단 첫해인 2006년 다승(18승 6패)과 평균자책(2.23), 탈삼진(203개) 1위로 ‘트리플크라운’을 차지하면서 얻은 애칭이다. 그는 한국 야구 대표팀 에이스로도 빛났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야구 결승전에서 쿠바를 상대로 8과 3분의 1이닝 동안 2실점 역투로 금메달을 이끌며 미국 스카우트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류현진의 미국행은 이렇게 드라마틱했다. 고교시절 그에게 고작 30만 달러를 제안했던 다저스는 7년 만에 80배가 넘는 금액을 제시했다. 연봉도 협상 과정이 남아 있지만 연간 500만 달러(약 54억 원) 이상이 될 것으로 보인다.

야구에 대한 치열한 열정은 류현진이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다. 그는 등판하지 않는 날이면 더그아웃에 앉아 농담을 주고받는 평범한 20대 청년으로 보였다. 그러나 속내는 달랐다. 최고가 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팀 훈련이 끝난 뒤 숙소에 와서는 홀로 어깨 강화 훈련을 했다. 선발 로테이션에 맞춰 철저하게 몸을 만들었다.

그는 “다저스에서도 한화 시절 등번호 99를 달고 싶다”고 했다. ‘99’는 한화가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던 1999년을 뜻한다. ‘최고가 되겠다’는 염원이 담겨 있다. 한화에서 이루지 못한 우승을 빅리그에서 거두겠다는 의지를 보인 셈이다.

류현진의 메이저리그 진출은 1982년 출범한 한국 프로야구에도 큰 경사다. 국내 프로야구 선수로는 처음으로 빅리그에 직행하는 주인공이 됐기 때문이다. 한국야구위원회(KBO) 관계자는 “류현진은 메이저리그에서 한국 야구의 높아진 위상을 보여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꿈은 이제 시작이다. 그는 “마흔 살까지 미국 프로야구에서 뛰고 싶다”고 했다. 시속 150km 강속구와 변화무쌍한 체인지업, 그리고 든든한 배짱을 무기로 말이다. 박찬호(39·한화)는 한양대 재학 시절인 1994년 미국 프로야구에 진출해 아시아투수 최다승(124승)을 거뒀다. 류현진은 내년에 스물여섯 살이 된다. 야구 열정이 식지 않는다면 박찬호의 기록을 넘는 것도 꿈만은 아니다. 2013년 한국 시간으로 이른 새벽, ‘괴물’이 힘차게 공을 던지는 모습을 상상하면 벌써 가슴이 설렌다.

황태훈 스포츠레저부 차장 beetlez@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