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 국제부 기자
지금까지 많은 북한 주민은 NTSC방식의 남쪽 신호를 잡을 수 있는 외국산 TV로 몰래 한국 방송을 시청해왔다. 북한 TV의 절대 다수는 수입산이다. 남쪽의 방송 전파는 육지로는 평양까지, 산이 없는 서해 바다 연안에선 신의주까지 간다. 남쪽 사람들은 디지털TV를 사거나 지금 사용하는 아날로그TV에 정부가 지원하는 수신장비만 달면 문제가 없지만 북한 주민은 이젠 남쪽 방송을 영영 볼 수 없게 된다. 북쪽 주민이 최신 디지털TV나 수신 장비를 구하기는 여의치 않다. 돈도 돈이지만 간첩 색출 기관인 국가안전보위부의 표적이 되기 때문이다.
강원도에선 이미 지난달 25일로 아날로그방송이 종료되면서 북한 강원도 주민들은 울상이라고 한다. 내년이면 지상파를 통해 한국 프로그램을 볼 수 있는 곳은 북-중 국경 일대 지역뿐이다. 이곳 주민들도 한국 TV는 직접 볼 순 없지만 중국산 ‘MP4’(한국의 DMB 기기와 유사)나 ‘노텔’(TV 시청이 가능한 소형 노트북)을 몰래 들여와 중국 방송사들이 틀어주는 한국 프로그램을 볼 수 있다.
북한 TV 방송체계는 위성으로 쏘는 중앙TV 신호를 각 지역 초단파중계소들이 받아 다시 중계하는 식이다. 지역마다 TV 주파수가 서로 다르다. 채널을 고정시켜 버리면 그 TV는 다른 지역에서는 못 쓴다. 북한에서 TV는 집에서 가장 비싼 재산이다. 어떤 TV가 있느냐에 따라 밖에서 어깨에 힘 좀 줄 수도 있고 기가 죽을 수도 있다. 한국으로 치면 자가용 승용차쯤에 해당된다고나 할까. 그런데 그런 귀중한 재산이 특정 지역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그야말로 ‘바보상자’가 되는 꼴이다.
당연히 주민들이 ‘뿔’이 나지 않을 수 없다. 당국도 불만이 심각하다고 생각했는지 “김정은 대장의 배려로 앞으로 휴전선 인근 북한 지역에 우선적으로 유선 TV망을 설치해 더 좋은 화질로 조선중앙TV를 볼 수 있게 해 주겠다”고 달래고 있다 한다. 하지만 그게 말뿐이라는 건 삼척동자도 다 안다.
올해 3월 한국 지역 신문이 김정일 사진을 사격표적지에 사용했다며 북한이 거세게 반발했을 때 나는 지역의 작은 신문 보도까지 체크하는 북한의 정보력에 놀랐다. 그런데 TV 채널 고정 소동을 보면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다. 아날로그방송 종료 광고를 얼마나 많이 했는데 한국 TV는 안 보고 사나? 북한의 대남 담당자들은 인터넷에서 ‘김정일’ ‘김정은’만 검색하나? 그래도 동아일보는 보겠지 싶어 한마디 해주고 싶다.
“어이구, 이 사람들아. 헛고생 그만해. 여긴 아날로그 시대가 사실상 끝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