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의 언어 수신호, 알수록 재미있네
서울 노량진수산시장 경매인의 손이다. 중매인들의 눈이 그 손에 집중된다. 경매인의 소리 말고는 입이 아니라 오직 손만이 이야기를 하는 시간과 공간. 손들은 많은 말을 나누고 멈추기를 거듭한다. 손은 언제나 말하고 있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손이 말한다
9일 오전 3시경, 서울 노량진수산시장에서 수산물 경매가 한창이었다. 번호가 적힌 모자를 쓴 중매인 20여 명이 생선이 담긴 노란색 플라스틱 어상자(생선을 담는 상자) 대열 앞에서 현란하게 손가락을 폈다 오므렸다 한다. 수지(手指)식 경매 수신호다. 주먹 쥔 손에서 엄지손가락을 세우면 숫자 1 혹은 10을 뜻한다. 손가락을 펴는 방식에 따라 2에서 11까지 표현한다. 각 숫자를 나타내는 손가락 모양을 좌우로 흔들면 그 숫자의 반복이 된다. 예를 들어 숫자 2를 뜻하는, 검지와 중지로 만든 ‘V’자 모양을 좌우로 흔들면 22가 되는 식이다.
손은 팔, 얼굴, 머리 등 다른 신체 부위와 합쳐져 3000개가 넘는 동작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말을 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의사소통 방법의 하나인 몸짓 가운데 손을 놀려서 하는 이른바 손짓언어는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손짓, 그 상식을 뒤엎는 이야기’(바이북스·2009년)의 저자인 성균관대 비교문화연구소 이노미 선임연구원은 “손짓언어는 (인간의) 몸짓 중에서 사용 빈도가 가장 높다”고 설명했다.
손짓언어는 하고자 하는 말의 의미를 부연 설명하거나 증폭시킨다. 그리고 무엇보다 말을 대신한다. 대표적인 것이 우리가 주위에서 볼 수 있는 각종 수신호다. 청각장애인들이 쓰는 수화(手話)는 말을 대신한다기보다 어휘와 문법을 지닌 일종의 말이다. 그에 반해 수신호는 어휘와 문법이 없는 ‘숨은 언어’다.
수신호는 상황의 제약 때문에 말을 하는 것이 금지되거나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을 위해 생겨났다. 군 특수부대나 경찰특공대가 수색정찰, 작전 중에 하는 수신호가 대표적이다. 아프리카 남부 보츠와나와 나미비아 일대의 칼라하리 사막 지대에 사는 부시맨 부족은 사냥감에 은밀히 접근할 때 서로 수신호를 보낸다. 주로 사냥 대상이 되는 동물의 특징적 형태를 손으로 만들어낸다. 스쿠버 다이빙을 할 때 사용하는 수신호는 수화를 차용했다. 수신호의 특징은 간단하다는 것이다. 대한수중·핀수영협회 산하단체인 ㈜씨마스코리아의 정창호 대표는 “스쿠버 다이빙 수신호는 무엇보다 설명을 하지 않아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포인트”라고 말했다. 예를 들어 손바닥을 펴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면 ‘산소가 떨어졌다’는 뜻이고, 귀를 가리키면 ‘귀가 아프다’는 뜻이다.
청각장애인을 위한 배려에서였건, 시끄러운 상황에서 관객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였건 야구 심판의 수신호는 야구팬에게 하나의 언어다. 동아일보DB
수신호가 이렇게 공식적인 것만은 아니다. 우리 일상생활에서는 비공식적인 수신호가 서로간의 암묵적 동의 아래 만들어지고 활용되기도 한다.
▼야구장서… 경매장서… 공사장서… 입보다 빠르고 정확한 손짓언어▼
자생하는 손짓언어
서울 금천구 독산동 가산중학교 2학년 한 교실에서 남학생이 선생님에게 새끼손가락을 들어올리더니 뒷문으로 나간다. 얼핏 보기에는 교권 추락의 현장이지만 사실은 선생님과 학생 간 통용되는 수신호가 쓰인 것이다. 수업시간에 새끼손가락을 들면 ‘작은 일’을, 엄지손가락을 들면 ‘큰 일’을 뜻한다. 손가락을 간절히 앞뒤로 흔들면 ‘급하다’는 뜻이다.
이 학교의 최정윤 과학교사가 지난해 1월 교원연수를 받던 중 영화 ‘쇼생크 탈출’의 한 장면을 떠올리며 이 수신호를 고안했다. 30년 넘게 징역을 살다 가석방된 뒤 대형 식품매장 계산원으로 일하게 된 레드(모건 프리먼)는 매번 화장실에 갈 때마다 점장의 허락을 받는다. 손님들 앞에서 계면쩍어진 점장이 “소변보러 갈 때마다 허락을 받을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이런 교실 내 수신호는 꽤 긴 역사를 갖고 있다. 1995년 경남 마산시 Y여자중학교 1학년이던 손모 씨는 자기 반 수신호의 풍경을 이렇게 기억한다. “한 학생이 엄지와 검지를 권총 모양으로 펴고 주위 급우에게 ‘있어?’ 하고 물어요. 그럼 다른 학생이 가방에서 생리대를 하나 꺼내주죠.” 막 사춘기에 접어든 여학생들이 남자선생님을 의식하며 만든 수신호였다.
공군 작전사령부근무지원단 군악대에도 관습적인 수신호가 있다. 음악을 시작하기 전, 지휘자가 왼손과 오른손을 차례로 들면 연주자들은 마음속으로 ‘셋, 넷’을 세며 한꺼번에 악기를 든다. 음악을 끝내기 전에는 지휘자가 왼손을 높이 들어 깜빡이는 비상등처럼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한다. 네 마디 뒤에 음악을 끊을 테니 준비하라는 뜻이다.
군악대장 박재경 대위는 “수시로 음악 연주의 길이를 늘이고 줄여야 하는 군악대의 특성 때문에 수신호를 쓴다”고 했다. 군악대는 행사에 참석한 최고 계급자의 움직임에 맞춰 그때그때 연주시간을 조절해야 하는 일이 빈번하기 때문이다. 박 대위는 “수신호는 번잡한 행사에서 군더더기를 없애주는 친절한 설명 역할을 한다”고 덧붙였다.
미국 USC영화예술대의 토드 보이드 석좌교수(대중문화 전공)는 “우리의 문화는 모든 것을 가장 본질적인 의미요소로 압축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분석했다. 군더더기가 없으면서 가장 본질적인 의미요소로 우리는 자주 손을 선택하는 것이다.
지금은 주행 정보 단말기가 보급되면서 거의 찾아보기 힘들지만 고속버스 운전사들도 수신호를 즐겨 썼다. 같은 회사 소속의 버스가 맞은편에 지나갈 때 자신이 본 도로 상황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먼저 상향등을 켜서 상대 운전자의 주의를 모은 뒤, 양 주먹을 짧게 서로 부딪치면 ‘앞에 사고가 났으니 조심하라’는 뜻이다. 왼손을 펴고 그 위에 오른손으로 뭔가 적는 시늉을 하면 ‘경찰 단속 중’이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트럭이나 택시 운전사들 사이에서도 각자의 방식으로 의사를 주고받는 수신호가 있(었)을 것이라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처럼 말을 대신하는 손짓언어는 자생적으로 생성되기도 하지만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소멸되기도 한다. 언어처럼 손짓언어도 명멸(明滅)을 거듭한다.
손의 침묵
유니버설발레단 제공
이 손동작을 누가 처음 만들어냈는지를 알기는 쉽지 않다. 중요한 것은 손짓언어는 모방성이 뛰어나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손짓언어는 ‘행동 전염’이 잘된다는 특성이 있다. 대중은 어느 한 가지 손짓을 급속히 따라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노미 선임연구원은 “최근 영화, TV, 인터넷,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의 대중매체와 네트워크가 전 지구적으로 촘촘히 깔리면서 손짓언어의 동질화 현상이 더욱 강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한 문화의 고유한 손짓언어가 외래문화에서 유입된 손짓언어로 대체되거나, ‘외래종’을 차용하는 사례도 생긴다.
20∼30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 남성사회에서 성기를 비유하거나 은유하는 욕을 나타내는 손짓언어는 검지와 중지 사이에 엄지손가락을 끼우는 것이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나머지 손가락은 접은 채로 두고 가운뎃손가락만 높이 세우는 손짓으로 바뀌었다. 또 ‘엿 먹이다’ 또는 ‘감자를 먹이다’라는 뜻으로 오른 주먹으로 왼 손바닥을 쓸어 올리며 치켜드는 손짓도 거의 보기 힘들어졌다.
걱정이라면 손짓언어 자체가 사라지는 현상이다. 노량진수산시장의 경매 현장에서는 수지식 경매와 전자식 경매가 함께 쓰이고 있다. 예전에 수지식 수신호를 쓰던 청과물시장이나 화훼시장은 이미 전자 경매만 하고 있다. 전자 경매는 손바닥만 한 크기의 전자계산기 비슷한 기기를 이용해 입찰가격을 손가락으로 누르는 방식이다. 수지식보다 속도가 느릴뿐더러 숫자를 잘못 눌러서 원하지 않는 가격으로 입찰하는 일도 생긴다. 노량진수산시장의 조성홍 경매과장은 “속도로 따지면 전자 경매가 수지식보다 두어 배 느리다”고 말했다. 경매인과 중매인 간의 불법적인 담합 시도를 막기 위한 방식이라지만 왠지 낭만을 잃었다는 느낌이 조 과장의 목소리에 배어 있었다.
또 SNS가 발달하다보니 회사 내 직원, 또는 연인 간의 은밀한 수신호도 자취를 감췄다. 부장 몰래 술이나 한잔하자고, 동료 몰래 데이트를 하자며 보내던 수신호들을 이제는 각종 메신저가 대신한다. 손짓이 ‘언어’가 아니라 자판을 두드리는 ‘동작’으로만 퇴화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손이 침묵하기 시작했다고 말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비(非)언어 커뮤니케이션 학자들은 인류의 초창기부터 손짓언어야말로 중요한 의사소통 수단이었다고 말한다. 새로운 손짓언어, 수신호들은 마르지 않고 나타날 것이라는 전망도 제시한다. 손은 끊임없이 말을 건네고 있다.
권기범 기자 kaki@donga.com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