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의 110분, 그에겐 3만1680분이었다칠성판 위에서 22일 동안 발기발기 찢겨진 인간성
영화 ‘남영동 1985’는 1985년 9월 고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서울 용산구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당했던 고문을 소재로 한 르포르타주다. 가운데 웃통을 벗은 이가 김 전 고문을 모델로 한 김종태(박원상), 청진기를 들고 있는 이가 고문기술자 이근안이 모델인 이두한(이경영)이다. 아우라 픽처스 제공
영화 ‘남영동 1985’(11월 개봉)가 부산국제영화제(BIFF)를 끓게 하고 있다. 이곳에서 처음 선보인 ‘남영동 1985’는 고문에 대한 독한 르포르타주다. 영화는 110분 내내 관객을 ‘칠성판’(고문을 위해 만들어진 나무 탁자. 원래는 관 속 바닥에 까는 판) 위에 옭아맨다.
이야기의 뼈대는 1985년 9월 고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서울 용산구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당했던 22일간의 고문 기록이다. 여기에 피해자들의 증언을 더해 폭력의 민낯을 낱낱이 벗겨낸다. 김근태는 극 중 김종태로, 고문 기술자 이근안은 이두한으로 이름만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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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두한의 등장과 함께 영화는 고문의 카탈로그를 펼쳐 든다. 잠 안 재우기, 정강이에 야구 방망이 끼우고 무릎 밟기 같은 ‘기초코스’는 눕혀진 김종태에게 날아드는 발길질에 비하면 가벼워 보인다. 고문은 자백에 대한 저항을 먹잇감으로 살을 찌워 간다.
죽지 않을 만큼의 시간 계산을 위해 이두한의 손에 스톱워치가 쥐어지면 김종태의 손에는 땀이 찬다. 땀이 차야 전기가 잘 통하는데, 시간이 없으면 온몸에 소금을 바르고 전기 스위치를 올린다. 수사관 한 명은 김종태의 회음부가 터지는지 유심히 살핀다. 물고문의 ‘응용코스’인 고춧가루 물고문. 얇은 손수건을 올려놓은 얼굴에 고춧가루 물을 부으면 발은 또 발레를 한다. “자백을 하겠다” “동료들을 다 팔아버리겠다”고 해도 탄력이 붙은 이두한의 마성(魔性)은 이성을 압도한다. 잠깐의 휴식시간, 카메라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훑은 김종태의 발가벗겨진 몸은 인간이라는 표시가 지워진 듯하다.
영화 속 극도의 공포와 폭력을 도드라지게 하는 기제는 일상성이다. 이두한은 ‘마누라’의 미장원을 걱정하고, 젊은 수사관들은 칠성판에서 내려진 김종태에게 연애 상담을 한다. 마치 회사원처럼 수사관들은 서로를 ‘사장님’ ‘전무’ ‘과장’이라고 부른다. “빨갱이를 때려잡아 애국하자”는 이데올로기는 벽에 걸린 대통령 사진처럼 장식에 불과하다. 수사관들이 승진을 위해 김종태에게 요구하는 것은 ‘인간성의 포기’다.
‘남영동 1985’의 주인공은 김근태도 이근안도 아니다. 인간 영혼을 철저히 파괴하는 고문이다. 이 영화는 110분간 ‘고문의 모든 것’을 보여준다. 아우라 픽처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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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