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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북 카페]日현대정치 탐구서 ‘전후보수당사’

입력 | 2012-09-15 03:00:00

自民黨의 흥망성쇠가 한눈에




# 탄생 1945년 8월 11일 저녁 나가노(長野) 현 가루이자와(輕井澤)의 한 산장. 패전 직전의 상황을 고민하고 있는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朗) 씨에게 아시다 히토시(芦田均) 씨가 찾아왔다. 아시다 씨는 일본에 항복을 권고한 포츠담 선언 소식을 전했다. 그들은 밤늦게까지 일본의 앞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 후 약 7년. 1952년 10월과 1953년 4월에 총선이 실시됐다. 두 총선에서 사회당의 약진이 두드러지자 경제계를 포함한 보수 세력은 위기의식을 느끼기 시작했다. 사회당은 점차 세력을 키우며 ‘개헌 저지’를 할 수 있는 3분의 1 의석을 차지한다.

그러자 보수도 결집하게 된다. 1955년 11월 자유당과 민주당이 합당하면서 자유민주당(자민당)이 탄생했다. 이때쯤 하토야마 씨는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그는 1954∼1956년 총리를 지냈고, 재임 기간에 보수합당을 성사시켰다. 그리고 자민당의 초대 총재가 됐다. 전후 50년 이상 일본을 이끌어 온 자민당 역사의 시작이었다.

# 성장 자민당이 집권한 1955∼1973년 일본 경제는 거침없이 성장했다. 그 배경에는 자민당 중심의 정치계와 관료, 재계의 삼각협력관계가 있었다.

자민당 일당지배체제는 경제정책의 지속성과 예측가능성을 높였다. 자민당 정부는 철강, 자동차, 전기기계, 전자 등 전략산업을 선택해 연구개발 보조, 세제상 우대조치, 국내 시장 보호 등을 통해 집중 지원했다. 기업들에 유리하게 자금 지원이 이뤄질 수 있도록 금융도 주물렀다. 기업들은 과감한 설비투자와 고용, 그리고 성장으로 화답했다. 일본 경제가 고도성장하자 국민들은 자민당에 열광했다. 1950, 60년대 자민당의 지지율은 60% 안팎이었다.

하지만 1973년 1차 오일쇼크를 기점으로 경제가 주춤하기 시작했다. 이후 일본 정국은 보수와 혁신의 백중세가 이어졌다. 자민당은 단독으로 과반을 채우지 못해 친여 무소속을 흡수해 겨우 정권을 유지했다.

1980년 6월 22일 중의원과 참의원 동시 선거는 중요 풍향계였다. 흔들리기 시작한 자민당이 종점에 도착할 것인지를 판가름하는 선거였다. 하지만 자민당은 중의원 의석 511석 중 과반을 훨씬 넘는 284석을 차지했다. 국민들은 변화로 인한 불안한 미래보다 안정을 바탕으로 한 현재를 택한 것이다.

# 좌절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이미 1960년대 중반 이후 자민당은 파벌주의와 ‘돈’ 정치에 휘말리면서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대표적 정치 스캔들인 록히드사건과 리크루트사건도 터졌다. 1976년에 일어난 록히드사건은 미국의 록히드사가 일본 정부의 고위 인사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뿌린 사건이다.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총리가 기소되고 자민당 의원 여섯 명이 탈당하는 등 큰 파장을 일으켰다.

# 저자 소개 이상은 ‘전후보수당사’에 나오는 내용이다. 자민당 역사를 통해 일본의 전후 정치사를 묘사했는데, 특히 인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일본 현대사에 등장하는 선 굵은 정치인은 모두 다 등장하는 느낌이다. 저자 도미노모리 에이지(富森叡兒) 씨는 아사히신문사에 입사해 정치부장, 편집국장 등을 지낸 기자다. 정치부 기자로 지내며 무수한 기사를 쏟아냈지만 긴 흐름에서 시대를 관통해보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그런 욕구가 이 책을 탄생시켰다. 일본 정치사와 정치인을 공부하려는 이들에게 추천할 만하다.

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