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서 역도선수 모집광고 보고 달려가… 6개월만에 세계대회 메달 걸어
세계역도연맹이 여자 역도를 보급하기로 결정한 때는 1984년. 한국은 1987년 처음 선수등록을 받았다. 그해 선수모집 광고를 보고 찾아간 원순이는 이를테면 ‘여자 역도 1기 공채선수’인 셈이다. ‘O₂’가 18일 충북 진천군의 국가대표종합훈련원에서 원조 ‘바벨의 여왕’을 만났다.
경기 성남의 집에서 ‘동대문운동장’이 적힌 버스를 무작정 잡아탔다. 멀미가 심해 차 타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던 때였지만, 그것도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곳에선 남자 역도 선수들이 한창 훈련 중이었다. 유도와 배구에서 전향했다는 몇몇 여자 선수도 있었다. TV 광고를 보고 찾아온 건 그 혼자였다. 감독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전력 질주를 몇 차례 시켰다. 관절 상태도 점검했다. 그러곤 ‘합격’이라고 했다. 이런 싱거운 테스트가 있나 싶었지만, 어쨌든 기쁜 일이었다.
훈련은 바로 그날 시작됐다. 남자 선수들의 자세를 보면서 역도에 대한 기본적인 설명을 들었고, 윗몸일으키기 등 기본 체력훈련도 했다. 막 땀이 나려 할 때 감독은 “내일 다시 와”라고 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십중팔구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들 했단다. 다음 날 그는 동대문운동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다음 날도, 또 그 다음 날도 그는 버스를 탔다. 1987년 4월. 대한민국 여자 역도의 1세대 스타 원순이(44)는 그렇게 처음 바벨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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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역도를 하고 싶었던 건 아니다. 단지 운동을 하고 싶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누구보다 운동을 좋아했지만, 시작할 시기를 놓쳐버렸다. 체육교사도 그의 재능을 일찍 발견했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늘 아쉬워했다. 졸업 후엔 경찰시험을 준비했다. 운동을 잘하니 경찰이나 군인이 되면 적성에 맞을 것 같았다. 그러다 TV에서 역도선수 모집광고를 본 것이었다.
막상 역도선수가 되자 내세울 건 자신감뿐이었다. 그해 11월 미국에서 열릴 제1회 세계여자역도선수권대회까지는 6개월밖에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자세는 어림짐작으로 익혔다. 40kg건 50kg건 닥치는 대로 들었다. 그런 무게에 적응되지 않았던 몸은 금방 고장을 일으켰다. 잠을 자다 근육 경련이 오고 쥐가 나는 바람에 소리를 질러대기 일쑤였다. 왜 자꾸 악몽을 꾸는지,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묻던 어머니가 결국 사실을 알게 됐다. 체중 조절을 위해 밥을 굶다 아버지에게도 들켰다. 다행히 심한 반대는 없었다. 두 분 모두 “역도가 뭔지는 몰라도 할 수 있을 때까지만 해”라고 했다. 그해 세계선수권대회에 참가한 한국 여자 역도 선수는 그를 포함해 딱 3명이었다. 그리고 돌아올 때 메달(은메달)을 걸고 온 건 그 혼자였다.
“솔직히 그때까지도 역도라는 운동에 대한 개념조차 없었어요. 그런데 동기 부여가 참 무섭더군요. 한 번 입상을 하니까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어요.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죠.”
이듬해 초 헝가리에서 열린 한 국제대회에서는 처음으로 금메달을 땄다. 당시 ‘무적’으로 군림한 중국이 불참한 덕분이었지만, 그래도 한국 여자 역도 사상 첫 우승이었다. 그는 일약 스타가 됐다. 세계선수권 메달 획득 이후 영입을 추진하던 한국담배인삼공사 팀에서는 공항까지 마중 나와 계약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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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번의 좌절, 그리고 은퇴
아시아경기가 얼마 남지 않은 때였다. 컨디션이 한창 올라 있어 자신의 기록 정도는 충분히 깰 것 같았다. 은메달은 확실했고 운이 좋으면 금메달도 노리겠다 싶었다. 그런 자신감이 결국 화를 불렀다. 연습부터 무리한 무게를 시도했다. 결과는 실패. 또 한 번 들었지만 실패. 거기서 참았어야 했다. 괜한 오기로 두 번이나 더 시도했고, 지친 몸은 이를 견뎌내지 못했다. 팔꿈치 부상. 뒤늦게 후회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베이징에선 제 기량을 펼치지도 못한 채 동메달 1개(합계)라는 아쉬운 성적표를 받아 들었다. 다른 대회에선 연습보다 실전에서 펄펄 날았던 그였으니 아쉬움도 컸다. 그래서 또다시 4년간 칼을 갈았다.
1994년 아시아경기가 열린 일본 히로시마. 1991∼1993년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꾸준한 성적을 올렸고, 훈련량도 충분했다. 무엇보다 20대 중반을 넘기면서부터 ‘관록’이란 게 붙었다. 힘만 쓰는 게 아니라, 몸의 구석구석을 활용할 줄 알게 된 것이었다.
“역도의 기술을 비로소 깨달아 가고 있었어요. ‘아, 역도는 이렇게 하는 거구나’ 하는 그런 느낌 말이에요. 그 전까지는 오로지 정신력밖엔 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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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바벨과 마주하다
그는 올 4월부터 충북 진천선수촌에서 트레이너로 일하고 있다. 그의 역할은 국가대표 선수들의 체계적인 훈련을 돕는 일. 특히 역도가 순발력이나 파워를 키우는 데 유용하다고 알려지면서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선수들이 많아졌다. 그래서 요즘은 역기도 조금씩 들고 있다. 아주 잠깐 후배들을 가르친 적은 있지만 거의 15년을 역도와 떨어져 살았던 그다.
“시범을 보일 때 부끄럽지 않으려면 지금이라도 열심히 연습해야죠.”
운동만 하다가 20대가 훌쩍 지나갔고, 30대에는 홍보 등 전혀 다른 일을 하다 보니 남자친구 하나 만날 사이가 없었단다. 그래서 대한민국 최초의 여자 역도 스타는 아직 미혼이다. 게다가 지금까지도 하고 싶은 게 너무 많다. 지난해부터 공부를 시작한 그는 현재 석사학위 논문을 준비 중이다. 본인이 감당할 수 있겠다 싶으면 박사학위에도 도전할 생각이란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여자 역도 후배들을 가르치고도 싶다. 아직은 스스로가 많이 부족하다지만 욕심만큼은 숨기지 않는다.
“역도도 물론 선천적으로 타고난 재능이 있어야 하죠. 그래도 다른 종목과 비교하면 꾸준한 연습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종목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인 바람은 조금 모자라지만 열심히 한 친구들이 빛을 봤으면 좋겠어요.”
한국 여자 역도의 첫 페이지를 장식했던 원순이. 그는 아직 바벨을 놓지 않았다.
진천=글·사진 김창덕 기자 drake007@donga.com